환경과 생태

앞산에서 떠 올리는 부활의 의미

녹색세상 2009. 4. 14. 00:17

 

▲ 건설자본과 권력이 야합해 파괴한 앞산 달비골의 숲, 끝을 모르는 인간의 탐욕이 낳은 재앙이 온다는 것을 모르는 멍청한 짓이다.


이번 일요일은 죽어서 무덤에 묻힌 예수가 살아났다는 부활절이었습니다. 팔레스틴 촌놈으로 태어나 남들이 기피하고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하던 별종이요, 철저히 왕따를 당한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에 처형당했는데 무덤을 덮고 있던 돌이 파헤쳐져 있어 죽지 않고 부활했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진보적인 신학자나 성서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부활신화’로 표현하며 ‘부활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의미’를 더 소중히 여깁니다. 성서를 하느님 말씀으로 믿고 소중히 여기는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보면 그야말로 완전히 ‘날나리 신앙’이라며 기절초풍할 일임에 분명하지만 이는 사실이지 결코 지어낸 것이 아님을 신학의 기본만 안다면 다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본당신부나 담임 목사에게 물어 보면 거짓말이란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부활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고 할 뿐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날나리 해석’을 하는 사람 중의 하나 임을 밝힙니다.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면 그 의미가 중요하다고 보느냐’고 하던 분명한 사실은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고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사건이라는데 양쪽 모두 동의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고난 없는 부활은 사기임에 분명하지요. 그렇습니다, 씨앗이 죽지 않고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채로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내가 죽어야 새로이 부활할 수 있고, 지금까지 지녀온 관성과 타성을 벗어 버리고 방향 전환(회개)할 때 진정 부활의 새벽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 아무리 파괴해도 새 생명을 새싹을 틔우면서 살아나는 게 자연의 법칙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겸손한 자세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모르는 오만이 화를 불러일으킨다.

 

예수와 같이 ‘하느님 나라 확장 운동’에 뛰어든 제자들 중에는 로마의 식민 치하가 지긋지긋해 해방의 열망 하나로 살아가는 열혈 투사들도 있었고, 누가와 같이 의사를 하는 먹물도 있었지만 고기잡이는 하는 하층 민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식민지의 하층민들의 삶은 이중 착취로 상상만으로도 지긋지긋해 떠 올리는 것 자체가 고역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분명 지는 싸움에 뛰어든 멍청이 입니다. 질 줄 알면서도 죽을 각오를 하고 뛰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모함도 받고 철저히 왕따도 당했으니 얼마나 그 고통이 컸겠습니까? 상상만으로도 죽을 맛이었을 것 입니다. 자연을 사랑하기에 앞산을 지키려는 앞산꼭지들 역시 멍청하게 건설자본과 권력에 마짱 뜨겠다고 달려들었습니다. 똑똑하고 머리 팽팽 돌아가는 인간들 다 토끼고 난 뒤에 오직 몸 하나로 뛰어 들었습니다.


예상처럼 권력과 자본에 맞서 이기지 못하고 깨졌습니다. 질 줄 알았지만 막상 지고 보니 허탈하기 그지없습니다. 경찰에 끌려가서 감옥이라도 갔으면 차라리 속이라도 시원하련만 겨우 ‘업무방해’로 고소당하는 수모까지 당했으나 속이 온전할리 만무하죠. 비록 깨지긴 했으나 결코 실패한 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씨앗을 뿌렸다고 믿습니다. 씨앗이 뿌려졌으니 가만 두어도 자라기 마련이지만 자연과 인간사가 다른 게 있다면 노력 여하에 따라 씨앗이 자라 열매 맺는 시기가 달라진다는 것 입니다. 이것을 ‘역사의 필연’이라고 부르죠. 앞산꼭지는 앞산이 아닌 자연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깨졌지만 새로이 부활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자기 신념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했을 겁니다. 남들이 모두 ‘순간의 편리’에 빠져 자연의 소중함을 모를 때 ‘앞산을 위해 지켜야 한다’는 분명한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련이 오지만 그 고난은 분명 값진 것이죠. 앞산터널이 뚫린다 해도 자연을 지키고 생명을 지키려 몸부림치던 앞산꼭지들의 정신은 곳곳에서 부활해 살아나리라 믿습니다. 지금의 패배가 건설자본과 권력의 눈에는 영원한 죽음으로 보일지 모르나 부활의 새벽이 다가온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앞산을 지키려던 그 정신은 곳곳에서 살아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간들이 살 수 없기 때문에 살아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희망 품을 내일이 올 것을 믿는다’는 어느 기자의 방송 끝말이 결코 헛말이 아님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