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김진홍의 ‘번창’ 신앙과 허병섭의 ‘밀알’ 신앙

녹색세상 2009. 3. 6. 17:13
 

김진홍과 허병섭 목사의 너무 같으면서 너무 다른 이야기

                                                

너무 닮은 두 사람이 있다. 둘 다 1941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68세다. 둘 다 경상도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둘 다 20대에 서울로 올라갔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었다. 둘 다 젊은 시절 빈민가에서 목회했다. 1970년대 초 이들이 목회했던 곳은 넝마주이, 창녀, 거지, 막노동꾼, 깡패, 장애인들이 뒹굴고 살던 신설동, 중랑천, 청계천의 빈민가였다.

 

다 같이 사용하는 변소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기다란 줄이 아침이 열릴 때마다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혈기 왕성했던 30대 초반 시절, 둘은 한편으로는 넝마주이로,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로 이들과 더불어 살았다. 허병섭은 1971년 목사가 되어 군목 생활을 한 뒤, 1974년 중랑천과 청계천에서 빈민들과 같이 살았다. 서울시에 의해 청계천 무허가 판자촌 강제 철거 작업이 진행되자, 이번에는 산으로 올라갔다.

 

1976년 하월곡동 산꼭대기에 동월교회라는 달동네 교회를 세웠다. 거기서 가난한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똘배의 집'이라는 코믹한 이름의 탁아소를 세웠다. 병든 사람들을 위해서는 무료 진료를 알선해주었고, 집 없는 사람들의 내 집 장만을 위해서 공동 주택 조합을 만들었다. 정부의 무자비한 철거 폭력이 벌어질 때는 몸으로 맞서 싸웠다.

 

 ▲ 71년 청계천에 세운 활빈교회와 비교할 수 없이 큰 활빈교회(두레교회)가 36년 뒤인 2007년 경기도 구리에 세워졌다.


이러한 그를 박정희는 빨갱이로 낙인찍었다. 1976년 서울 시경 대공분실에 끌려가서 50일이 넘도록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고문을 당했다. 그 이후 연행과 구금만 20번이 넘었다. 전두환 시절인 1986년에는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때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재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를 외치면서 분신하고 할복할 때였다. 그는 “왜 젊은이들이 죽어야 하나, 차라리 목사들이 희생되어야 하지 않느냐?”면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이 일이 자극이 되어 150명의 목사들이 민정당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허병섭은 시위 주동자로 찍혀서 6개월 넘게 옥살이했다. 청계천에서, 달동네에서, 차가운 유치장 바닥에서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30~40대를 보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삶에 감화되어 예수를 알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1982년 이동철(본명 이철용)이 소설로 쓰고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만든 ‘어둠의 자식들, 꼬방 동네 사람들’에 나오는 목사 공병수의 실제 인물이 허병섭이다. 장애인이면서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1988년 국회의원이 된 소설가 이철용은 5공 청문회 때 증언대에 선 전두환 얼굴에 대고 삿대질을 하면서 ‘살인마’라고 외쳐서 유명해졌다. 그는 허병섭이 한때 포장마차 사장이었을 때 거기서 그를 만나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었다. 지금은 역술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장로로서 기독교를 믿고 있다.


영화감독 이장호는 “이동철은 내가 모르는 재야 운동권의 골수들을 끊임없이 소개했는데, 가장 인상에 남는 이가 바로 도시 빈민 선교로 봉사하고 있던 허병섭 목사였다. 이동철에게 신앙의 눈을 뜨게 한 장본인이다. 그분이 하루는 수줍은 말투로 ‘좋은 영화만 있다면 극장이 바로 교회의 역할을 하므로 목사가 따로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교회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으로 싹텄다.

 

그 후 <어둠의 자식들>, <낮은 데로 임하소서>, <바보 선언>, <과부춤> 등 계속해서 내 영화에는 허병섭 목사가 던진 기독교적 화두가 깊이 작용했다.”고 ‘씨네 21’에서 회상했다. 학생 운동을 하다가 강제로 끌려간 강원도 어느 부대에서 허병섭과 인연을 맺은 양국주(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국제 대표)는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허병섭이 최전방에서 군목으로 지내던 시절, 당시 중위 봉급이 2만 원이었는데, 1만원은 아내에게 생활비로 주고, 나머지로 담배와 껌을 사들고 병사들을 만나러 다녔다. 전역 후에는 포장마차 사장이 되었다. 다음날 장사할 몫을 떼어내고 남은 걸로 동네의 일용직 노동자, 부랑자들에게 공짜로 뜨거운 오뎅 국물과 소주를 먹였다. 내가 제대한 뒤 사업을 해서 돈을 좀 만지게 되어서 허 목사에게 20~30만 원씩 건네주면, 으레 술 먹고 싸우다가 유치장에 들어간 사람들 빼내오는 일에 쓰는 듯했다.”


군목이 병사들에게 복음은 전하지 않고 담배를 전하다니. 성령에 취하도록 하지 않고 술에 취하도록 만들다니. 저주하고 내쫓아도 시원치 않을 무당을 교회에 불러 함께 예배하지 않나, 노가다 판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이랑 어울려 술 먹고 담배 피우고 화투판을 벌이지 않나. 그러더니 결국은 사고를 쳤다. 허병섭은 1988년 기장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했다. 기장에서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는 동월교회에서 평신도와 평등하게 사역하는 교회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종교 성직자보다 평신도 신분으로 자신의 신앙을 올바르게 지키면서 살아가는 게 훨씬 힘들다는 교인들의 고민에 공감했다. 또 노동자와 함께 구속됐을 때 경찰이 목사에게는 존칭어를 쓰고 노동자에게는 욕설과 위협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목사라는 지위와 신분 때문에 받는 특혜를 괴로워했다.

 

목사직을 버린 다음 막노동판에서 노동자들과 어울리면서 미장일을 배웠다. 2년 뒤에는 일용직 건축 노동자들의 공동체인 ‘건축 일꾼 두레’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건축주와 노동자 사이에서 엄청난 이윤을 챙기는 중간 하청업자에 의존하지 않고, 건축주와 건축 노동자 간의 직거래를 텄다. 그로 인해 발생한 차액의 이윤만으로도 빈민 노동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건축 현장에서 빚어지는 온갖 비리와 모순을 없애려고 했다. 이 모든 변화를 통해 건축 노동자가 노동의 객체가 아니라 노동의 주체가 되도록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한계를 느꼈고 실망했다. “민중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놓아야 하며, 노동력을 팔아서 잘살아보려는 시장 경제 논리는 경매장의 아수라장 속에서 인간을 초라한 상품으로 전락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자신이 노동자들과 뒹굴 때 품었던 생각이다.

 

“그런데 이 신념이 차츰 깨지기 시작했다. 도시 빈민의 문제는 빈민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사회 구조가 도시 빈민을 그렇게 만들어간 것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이런 사회 구조를 바꾸는 일을 하기에는 내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연에 몸을 던졌다.“ 2000년 <신동아> 5월호에 쓴 글 일부다.


도시 빈민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한계를 느꼈다. 동시에 자기의 한계도 느꼈다. 그래서 더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하기로 했다. 1996년 무주로 내려갔다. 마을 이름은 진도리(眞道里).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는 말씀을 담고 있는 땅 이름이라서 더 좋다 했다. 여기서 농사지으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꿈꾸면서 살았다. 농약 쓰지 않고 오리와 우렁이를 풀어 짓는 유기 농법을 실험했다.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씨앗이라는 생명은 미생물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자신을 분해하고 해체하면서 스스로를 부식시킨다. 주변 미생물들과 치고받고 먹고 먹히면서 생명을 만들어낸다. 나는 이를 '밀알 노동'이라 말하고 싶다. 씨앗 하나가 얼마나 작은가? 그런데 거기에서 수백 수천 개의 열매가 맺힌다. 땅속 미생물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 그러나 이들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일으키고 있는가? 작은 자의 노동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노동은 밀알 노동이고, 자신을 분해하고 희생한다는 뜻에서 밀알 노동이다. 성서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구절에서 밀알 노동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도 육체 노동, 몸의 노동, 밀알 노동으로 시골의 일상을 수놓고 있는 것이다.“ (신동아 2000년 5월호)


올해 1월에는 2만 평 가까이 되는 땅을 마을 공동 재산으로 내놓았다. 옛날에 교회에서 받은 돈과 이리저리 마련한 돈을 모아 5000만 원으로 산 땅이다. 하지만 그는 ‘잠시 빌린 것일 뿐 내 땅이 아니다’며 그걸 자연환경국민신탁에 맡겼다. 여기서 생태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자연도 보존하고 마을 주민의 소득도 높이는 산촌 마을 자립 모델을 만들 계획이다. 그러면서 대안학교인 푸른꿈고등학교와 온배움터(전, 녹색대학)에 관여했으나, 총장이라는 직함보다 공동 대표, 공동 교사라고 불리길 좋아했다.


미약한 시작과 화려하게 번창한 나중


30살의 전도사 김진홍은 허병섭 처럼 청계천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렸다. 1971년 세운 활빈교회가 사역의 중심이었다. 이곳에서 '배달학당'을 만들어 청소년을 교육하고 '배꽃어린이집', '장미어린이집'이라는 탁아소를 만들어 어린이들을 돌봤다. 주민자활회, 의료봉사회 등을 조직해 빈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때로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것 같은 좌절감,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 가 하는 낙망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믿었다.


“나는 청계천 둑 위를 걸으며 상상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서울에 오신다면 어느 곳부터 방문하실까? 분명 세종로나 명동 같은 곳은 찾지 않으실 거다. 이 악취 나는 청계천을 찾으실 테지. 예수님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둑길을 걸으며 말씀하실 거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판자촌 주민들이여, 다 모이시오. 내가 여러분들을 푹 쉬게 하는 동민 위안의 밤을 열어드릴 것이오. 그렇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밀가루 다섯 포대와 동태 두 마리로 청계천 주민들을 배불리 먹이실 것이다.” (김진홍의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 김진홍은 30년 지기이자 기독교 장로인 이명박을 지지한다고 대통령 선거를 위한 특별 기도회(뉴라이트 기독교 연합 주최)에서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는 이명박이 대통령 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나 교회를 위해서나 유익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모든 걸 걸었다.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위해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반대 운동이 격렬해지자 대통령 긴급 조치라는 걸 발동했다. “유신 헌법을 반대하거나 개정하는 운동을 하면 징역 15년 형에 처한다.”는 기막힌 명령이었다. 김진홍은 1974년 1월 유신 헌법을 반대하는 시국 기도회를 연 죄목으로 다른 목사, 전도사 5명과 함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김진홍, 이해학 전도사가 주동자로 찍혀서 15년 형을 받았는데, 그나마 13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당시 이들의 변론을 맡았던 한승헌 변호사는 “피고인들은 성서적 진리에 따른 신앙적 결단으로 유신 통치와 긴급 조치를 반대하는 것이며, 그것은 크리스천의 사명이라고 의연하게 말했다.”고 했다. 그는 이 젊은 목사들에게 감명을 받고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한승헌 변호사는 사람을 잘못 봤다. 김진홍은 2004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민주 투사도 아니고 운동권도 아닌데, 어쩌다 줄을 잘못 서서 징역을 살았다. 어영부영 콩밥을 먹게 되었다.”며 보수 세력을 설득해야 할 때는 이렇듯 자신의 과거를 부정 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반대로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방식으로 데모하는 이들을 비난할 때는 자신의 과거 투쟁 경력을 내세웠다. “나도 한때는 민주화 운동을 한다고 데모도 하고 징역살이도 하고 매도 맞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민주화 운동 하던 때에는 민주주의라는 절대적 가치를 지키려면 운동의 내용도 민주적인 원칙을 지키면서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76년, 청계천 철거 작업이 강행되자 허병섭은 산으로 올라갔다. 반면 김진홍은 경기도 남양만으로 집단 이주를 했다. 현대판 출애굽을 이끄는 한국판 모세였다. 여기서 시작한 것이 두레 공동체 운동이다. 허병섭과 김진홍의 인생이 극명하게 갈리는 시점이기도 하다. 두레 운동이 때로는 실패를 맛보기도 했지만, 김진홍은 이때부터 시쳇말로 잘 나갔다.

 

그가 청계천 시절을 바탕으로 1982년에 쓴 신앙 수기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24년이 지난 2006년에 100쇄를 넘겨서 30만 권이 넘게 팔렸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아랍어 등 세계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고, 1989년에는 자신이 주인공이 된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가 쓴 자전 소설, 만화, 설교집, 묵상집은 수십 권에 이른다. 이메일로 보내는 ‘아침 묵상’을 받아보는 사람은 10만 명이 넘는다.


1995년 적십자사 봉사상 금장을 받았고, 1996년 모교인 계명대에서 명예철학박사가 되었다. 1998년에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잠시 교수도 했다. 2001년에는 미국 킹칼리지 명예신학박사가 되었고 그해 계명대학교, 계명문화대, 계명유치원, 동산의료원을 운영하는 계명기독학원 이사장도 했다.

 

대를 이어 계명대 장기 집권을 하고 있는 신일희가 약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 영입하고, 김진홍은 계명대학교를 접수하러 발을 들였다가 신일희와 권력 싸움에 밀려났다. 마치 온누리교회의 하용조 목사가 교인들을 한동대학에 집어 넣어 말아 먹은 것 처럼 하려다 물 먹은 셈이다. 소심하고 수줍음 많은 허병섭이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이를 고사하는 바람에 같이 빈민 운동을 했던 제정구가 후에 그 상을 받게 된 것과는 딴판이다.


두레 공동체는 미국, 일본, 독일, 중국 등 세계 곳곳에 세워져 있다. 미국에 있는 땅이 1000만 평방미터가 넘고, 미얀마의 땅은 3000만 평방미터에 이른다. 세계 곳곳의 두레 땅만 한데 모아도 웬만한 도시 하나는 세울 법하다. 해외와 국내에 각각 8개씩의 교회를 세웠다. 두레 공동체가 만든 대안학교, 복지센터, 문화센터 등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그는 다단계 사업에도 손을 댔다. 김진홍은 하나님 다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며, 자본주의는 성경적 윤리가 낳은 자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두레교회 성도들에게 “지금 두레내츄럴에 투자하면 10년 후에 큰 빛을 볼 수 있다'고 권유한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 대는 광경은 전형적인 다단계 장사꾼들의 수법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신앙을 빙자한 짓이니 오히려 더 교활하고 악랄하다.


국민들에게 주식 투자를 권한 이명박은 김진홍의 이 말에서 힌트를 얻었을지 모른다. 김진홍은 1997년 경기도 구리에 구리 활빈교회(지금의 두레교회)라는 교회를 세웠다. 10년 뒤인 2007년에는 예배당에 50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4층짜리 새 교회를 건축했다. 1971년에는 무허가 판자촌에 가마니 깔고 교회를 세우더니, 36년 뒤에는 권력과 유착해 특혜 시비를 일으키면서 교회를 세웠다. 입당 예배에는 이명박 대통령후보,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이 참석했다.


“네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훌륭하게 될 것일세.”라는 욥기 8장 7절에 나오는 성서 구절로 만든 장식용 현판은 신장개업한 동네 중국집보다 번창해질 대로 번창한 두레와 김진홍에 어울린다. 그가 목사라고 하니 이 구절은 하느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수아 사람 빌닷이 욥에게 한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의 창대해진 입지는 보수 집단을 하나로 묶고, 한국 사회를 박정희 시대와 같은 암흑기로 되돌리는 데에도 모세와 같은 몫을 톡톡히 했다.

 

이라크 파병 지지, 한반도 대운하 지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지지, 수도권 이전 반대 등은 준비 운동에 불과했다. 시장 경제 체제를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물신주의는 그의 지금 성공을 뒷받침해준 과거 고난의 시절마저 부정하게 만든다. “미국의 경우는 만일 데모하는 도중에 경찰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되면 현장 사살까지 허용한다. 가까운 나라 일본의 경우는 경찰을 폭행하는 경우에 강제 연행을 하여 엄한 실형을 내린다. 한국 경찰로서는 꿈같은 이야기다.”는 목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 논리대로라면, 그는 1974년 즉결 처형을 당했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대기업, 엘리트, 부자는 본받아야 할 대상이지, 규탄하거나 싫어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국민들이 지향(指向)하여야 할 사람들이고 대상이지, 지양(止揚)하여야 할 사람들이거나 대상이 아니다. 삼성이 과연 나쁜 기업인가? 삼성그룹의 총수인 이건희 회장이 나쁜 사람인가? 신문 보도에 의하면 어느 정당에 소속된 한 국회의원이 지금 해외에 나가 있는 이 회장을 체포해 올 체포조를 만들자는 말을 한 것 같은데, 과연 그렇게 할 성질일까? 나는 삼성그룹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는지, 혹은 어떤 법을 어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설령 어떤 부문에 하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다룰 성질은 아니라 여겨진다. 우리 사회는 법치 사회이다. 잘잘못은 사법 기관에서 다룰 일이고, 신문 지상에서 매도하거나, 그룹의 회장을 체포조 운운할 성질은 전연 아니라 여겨진다. 듣건대 삼성의 수출이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20%라 하고, 납세액이 전국의 5%가 넘는다 한다. 그리고 요즘 같이 청년 실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는 판에 많은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다. 나는 그런 삼성이 몹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삼성의 이 회장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체포조를 만들자는 발상까지 하고 있는 국회의원이 있다니 퍽 놀라운 일이다.“ (김진홍의 ‘아침 묵상’)


김진홍은 자신이 이렇게 말한 사실은 기억하고 있을까? 몇 번을 읽어도 위 아래 두 개의 글에서 드러나는 상반된 가치관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새벽을 깨우는 일이 나의 사명이다. 어둠에서 잠자고 있는 민중들에게 새벽을 알리는 사명은 위대한 사명이다. 이를 위해 일생을 살아야 한다. 한밤중에 잠들어 있는 한국 교회에 새벽이 다가옴을 알려야 한다. 가난과 질병에 잠들어 있는 청계천 판자촌의 6만 형제들에게도 새벽을 알려야 한다.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모른 채 호화로운 주택에 잠들어 있는 부자들에게도 새벽을 알려야 한다. 나는 밖으로 나가 새벽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땡그랑 땡- 땡그랑 땡-종소리에 일어난 듯 가까운 집의 창문에 등불이 밝혀지고 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


김진홍의 창대함은 2005년 뉴라이트 전국연합을 만들어 상임의장이 된 뒤, 30년 지기(知己)인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정점을 이룬다. 그리고 정치적 역할을 다했다고 판단, 올해부터는 목회에 주력하겠다며 두레교회로 돌아갔다.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


두 사람의 공통점은 참 많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서울 상경, 신학 공부와 목사, 빈민들과 어울림, 민주화 운동과 감옥살이,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진 삶, 대안적이고 생태적인 공동체 만들기, 수많은 사람들이 받은 감화와 변화, 심지어는 첫 번째 아내와 헤어지고 재혼한 것까지.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김진홍은 30여 년 전 악취 나는 청계천에서 미약하게 시작했으나, 지금은 번듯하게 변신한 청계천에서 창대하게 변신했다. 하지만 당시 그가 거닐던 청계천 둑길에 오셨던 예수님이 이명박과 김진홍이 함께 거닐고 있는 지금 청계천 둑길에 오실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목사로서 특혜가 부끄럽다며 목사직을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간 허병섭은 차가운 1월 화려한 도시의 어느 길목에 쓰러졌다가 발견되어, 한 달이 넘도록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일주일 먼저 쓰러진 아내를 간호하다가 극심한 스트레스와 체력 저하로 갑자기 뇌에 손상이 온 것은 아닐까 의심할 뿐, 원인도 모른 채 한 달이 넘도록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화려함과 창대함은커녕 비참하고 초라한 노년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30여 년 전 청계천에서 사셨던 예수는 지금 어디서 누구를 만나려 할까. 이 시대의 참된 목사를 찾아보기를 원하는 수많은 죄인들은 지금 어디서 누구를 만나려 할까? 나는 한 알의 작은 밀알이 되어 죽고 썩어지려 하나, 번창하고 화려하게 자랑하려 하는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오마이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