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중

우리는 당당히 투쟁하는 KTX 승무원입니다.

녹색세상 2008. 10. 1. 14:15

 

이제 긴 호흡과 변함없는 단호함으로 새로운 투쟁의 시작을 알립니다. ‘자회사 취업알선’을 거부한 것은 ‘자존심’을 지키는 결정이며, 이것은 3년의 투쟁에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KTX승무원들은 철탑농성을 마무리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철탑높이만큼 높았던 우리의 괴로움도 이제는 과거가 되었지만 철도공사의 최종 제시안을 접하고 느꼈던 절망은 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KTX승무원들은 지난 12일 철도공사가 제시한 ‘자회사로 적극 알선’을 받지 않는다고 결정했습니다.


그 결정의 과정은 지난 3년만큼이나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지난 3년간의 세월을 얼마나 또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시간을 ‘헛되게’ 만들지 않기로 했습니다. 비록 철탑투쟁이 패배했지만 굴복하지 않기로 한 이 결정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비정규여성노동자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자, 우리의 투쟁이 아직도 진행형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처음 투쟁을 시작할 때, “우리는 정당하니까 반드시 승리할 거라” 믿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세상.


사회 초년생, 모든 것이 서툴고 무엇 하나 두렵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이런 믿음이 우리를 세상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가슴을 짓눌렀던 터무니없는 오해와 편견도 꿋꿋이 견디어 내게 한 힘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한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것이 1년이 갔고, 1년이면 끝날 것이라는 기대가 어느새 3년이 다 되어갑니다. 예기치 않게 길어진 시간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혔고 지치게 했습니다.


견디지 못해 떠나가는 동료의 숫자가 늘어갔고 남은 사람들은 그 이상으로 힘들었습니다. 너무도 명백한 정당함이었고, 그토록 간절히 원한 바람이었지만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과 철도공사 경영진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거짓말, 터무니없는 궤변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압도적 힘으로 우리를 위협했습니다. 우리가 지쳐 보이거나 여론이 잠잠해져 상황이 조금만 변해도 어느새 그들은 포기를 강요했고 굴종하라고 압박했습니다.


지난 정부도 현 정부도, 지난 사장도 이번 사장도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인도적 차원의 선처”란 결국 지난 3년의 피눈물을 스스로 부정해 버리라는 말입니다. ‘소귀에 경 읽기’ 같았던 이철 사장이 도망간 후, 새로운 사장이 온다기에 내심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장이 부임하고, 다시 1달, 2달, 3달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도, 응답도 없기에 마지막 용기를 내어 위험천만한 철탑에 올라갔습니다.


이제나저제나 의미 있는 대화가 성사될 것을 믿고 버텼지만 돌아온 건, 우리의 순진함을 냉혹하게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철도공사는 “KTX승무원들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없지만 인도적(?) 차원에서 자회사 취업을 알선하겠다.”며 기막힌 제안으로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외주위탁 노동자의 설움과 차별을 바꿔보겠다고 지난 3년간 피눈물 나는 고생을 감수해 온 우리에게 또 다시 외주위탁 노동자로 취업을 알선하겠다”며 ‘인도적 처사’임을 들먹이는 철도공사의 후안무치함에 새삼 소름이 돋습니다.


3년간의 비정상적인 농성 생활로 극도로 지쳐버린 우리의 몸과 마음은 “그거라도 그만 받고 말자!, 투쟁을 이제 그만 끝내!”라고 말했지만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하는 서늘한 바람이 버려놓은 우리의 이성은 “죽으면 죽었지 지난 3년의 삶을 모조리 내팽개치라는 합의만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우리를 담금질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버렸습니다. 하지만 끝내 지쳐 쓰러질지라도 독이 든 사과를 먹을 만큼 우리는 어리석지 않습니다.


물리적 투쟁의 중단, 긴 호흡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투쟁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오랜 고민 끝에 결정하였습니다. 집회, 농성, 단식.....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우리의 힘으로 당신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가까운 시간 안에 새로운 변화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KTX 투쟁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당장은 법적 소송으로, 철도공사의 불법파견 행위를 증명해 낼 것입니다. 그리고 긴 호흡의 새로운 투쟁으로 전환합니다. 설령 우리가 새로운 회사에 개인적으로 재취업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투쟁을 끝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투쟁하는 KTX승무원입니다.


투쟁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가졌던 유일한 믿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가 변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투쟁을 멈추지도 않을 것입니다. 불의와 차별, 억압과 착취에 굽힘없이 저항하는 노동자의 투쟁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KTX승무원으로 다시 모일 것이고, 자랑스런 노동자로서 그 자리에 함께 할 것입니다. 이후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역사가 우리의 승리를 확인시켜 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KTX승무원 투쟁과 함께 해온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왔습니다. 그 분들의 연대와 도움이 아니었다면 KTX승무원은 이미 오래 전에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저할 때 용기를 주셨고, 도움이 절실할 때 아낌없는 헌신으로 우리와 함께 해 주셨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냉대를 막아주었고,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으로 투쟁의 외로움을 달래고, 우리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앞장서 증명해 주셨습니다.


철도노동조합의 조합원들께도 고마운 인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철저히 외롭고 고독한 싸움, 생계와 생활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릴 수밖에 없는 장기투쟁사업장 중에, KTX승무원들이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2만5천 철도조합원들의 변함없는 지지와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철도노동조합의 일원인 것이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더불어 지난 2년간 함께 동고동락하면 투쟁했던 새마을 승무원들도 우리에게 힘이 되었습니다.


지난 최종 협상에서 본의 아니게 입장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로인해 새마을 승무원들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었지만 언제나 든든한 동지로써 함께 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제 우리는 “당장 보기엔 우리가 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는 결코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힘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진실에 의해 움직여갑니다.”는 김진숙 언니의 말씀처럼 언젠가는 반드시 승리할 것을 변함없이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 긴 호흡으로, 하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단단함으로 새로운 투쟁, 역사적 투쟁의 시작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