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희미한 목소리의 대담한 간첩?

녹색세상 2008. 9. 16. 14:44
 

한국판 마타하리 사건이라며 범불교대회가 열리는 날 마치 맞불을 놓듯 발표했던 여공작원(간첨) 원정화 씨에 대한 첫 공판이 9월 10일 열렸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졌던 대한항공(칼) 여객기 폭파 사건의 김현희를 떠 올리게 한다. 발표하자마자 바로 재판에 들어가는 것을 비롯해 여러 면에서 흡사한 점이 너무 많다. 합동수사본부 발표에 따르면 탈북자로 위장해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원정화 씨는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선처를 호소했다. 지금도 유족들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김현희 사건과 진행과정이 너무 비슷하다. 긴 생머리를 뒤로 넘겨 땋은 모습으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주부 같은 분위기였다. 취재진의 촬영을 의식해 검은색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법원에 도착했다.

 

 ▲9월1일자 조선일보 <잘해주니까 암살 포기?... 의문투성이 여간첩>까지도 의혹을 제기하는 여공작원 사건. (사진:오마이뉴스)


재판장이 인적사항을 확인하자 들릴 듯 말 듯한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검사가 공소 사실을 낭독하자 계속 눈물을 흘려 “대담성과 뛰어난 임기응변 능력 덕분에 공작원으로 선발됐다”고 한 합동수사본부의 발표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어 의문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재판장이 ‘공소 사실이 맞느냐’고 묻자 순순히 인정을 했으며, 공판을 하루 앞 둔 9일 재판부와 담당 검사 앞으로 전향서를 제출한 것에 대해 “본인의 의사에 따라 제출했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예’라고 간단히 답했다. 전향서는 두 차례에 걸쳐 A4용지 3장 분량으로 “북한에서 태어난 것이 죄다. 다시 기회를 준다면 대한민국에서 평생 참회하며 살겠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피고인 원정화 씨는 유ㆍ무죄를 다투지 않고 혐의를 인정함에 따라 공판은 신분확인을 시작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돼 1시간 만에 끝났다. 이 역시 김현희 재판과 흡사하다.


공작원이라면 자신이 ‘불리한 대목은 철저히 함구하고, 유리한 증거는 밀어 붙인다’는 정도는 교육 받았을 텐데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곳이 아니다. ‘대담한 간첩’이 이리도 쉽게 공소 사실을 인정하고 넘어갈 정도라면 북한에서 공작원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았거나, 남한의 공안기관이 ‘꼼짝 못할 증거’를 들이대어 항복을 받아 냈거나 둘 중의 하나다. 남북이 아직 전쟁이 끝난 정전이 아닌 휴전 상태니 서로 공작원이 오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리도 쉽게 공소 사실을 인정하는 공작원을 ‘대담성과 뛰어난 임기응변 능력이 있다’고 한 합동수사본부의 발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 후 처음 20여 만의 불자들이 거리로 나온 날에 발표한 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물 타기’라는 의혹을 받지 않을 수 없고, 저의가 있음을 보여준 증거다. 이렇게 허술한 공작원을 보고 있으니 마치 앞뒤가 맞지 않은 엉성하기 그지없는 소설을 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