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디시폐인부터 아고리언까지

녹색세상 2008. 6. 23. 01:10
 

‘아고라와 디시가 동지에서 적으로 바뀌었다고?’


6월12일, 다음 아고라 베스트에 오른 글이다. 글쓴이는 자신을 디시인사이드(dcinside.com)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이디 ‘네이트폐인’이라고 소개했다. 5300여 명이 추천한 장문의 글은 ‘조선일보의 괴상한 기사에 휘둘려 흥분하지 말자’는 내용이었다. 문제가 된 기사는 조선일보 6월11일치 ‘촛불집회 인터넷 토론방끼리 설전’이다. 기사는 “한때 인터넷 토론문화를 이끌었던 디시인사이드와 현재 촛불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 사이에 심각한 대립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디시에선 아고라 이용자들에게 ‘좀비’란 별명을 붙이고, 아고라에선 디시 유저들을 ‘알바’라 부른다”고 보도했다.


이에 ‘디시폐인’과 ‘아고리언’이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서로를 비난하고 흥분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디시폐인이 아고라에 허심탄회한 장문의 글을 올렸고 아고리언들은 추천으로 화답했다. 아이디 ‘검객’ 등 여러 명이 “6월10일 대규모 집회 이후 보수언론이 적극적인 반론보다 서로 갈등을 유발하고 틈새를 노리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같은 날, 디시인사이드에도 ‘아고라인’이라는 이름으로 ‘고맙습니다, 여러분’이란 글이 올라왔다. 물론 아고리언과 디시폐인을 자극하는 글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런 글은 쏟아지는 게시물에 밀려 ‘곧 지나가고’ 말 뿐이다. 이 모습은 자정작용을 지니게 된 사이버 토론광장의 성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감정적 집단’으로 매도돼온 네티즌들이 신뢰할 수 있는 토론 공간을 확보하면서 사이버 광장 문화가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 ‘따로 또 같이.’ 6월10일 광화문에서 만난 디시폐인들은 ‘무적의 김밥부대’를 자청해 시민들에게 김밥과 물을 나누어 주었다.



“휘말려 싸우지 맙시다” 성숙한 분위기


디시폐인들의 주된 활동 무대는 주제별로 개설돼 있는 1천여 개의 ‘갤러리’다. 이곳에 주제와 관련된 사진을 올리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 기본 방식이다. 특유의 과감한 패러디와 사진 합성 등의 기술에 나름대로 역사성 있게 발전시켜온 디시폐인만의 언어와 대화 방식이 합쳐져 이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어왔다. 갤러리는 개인이 직접 개설할 수는 없고 네티즌들이 신청을 하면 김유식 대표 등 회사 쪽의 판단에 따라 개설된다. ‘촛불문화제 갤러리’가 6월4일에서야 생긴 것도 이런 구조 때문이다. 다음 아고라의 메뉴 구성은 좀 더 정치적이다. 정치ㆍ경제부터 종교ㆍ제품까지 토론하는 ‘토론’, 유머부터 고민까지 나누는 ‘이야기 즐보드’, 이슈청원ㆍ모금청원ㆍ추모서명 등 ‘청원’이 대표적이다. 메뉴 마지막엔 문화방송 ‘100분 토론’도 똬리를 틀고 있다. 각 코너에 들어가면 ‘베스트’ 글이 가장 전면에 배치된다. 댓글로 울고 웃기는 디시폐인과 달리 아고리언들에게는 진지한 ‘추천/반대’가 더 중요하다.


1999년 문을 연 디시인사이드는 2002년 월드컵, 2004년 탄핵 정국을 거치며 주목받았다. 2004년 대통령 탄핵 발의 이후 촛불집회에는 디시폐인들이 자신들의 상징인 ‘개죽이’ 깃발을 들고 나왔다. 이후 “탄핵을 심판하자”는 구호로 총선 투표를 독려하며 기존의 ‘솔로부대’ 패러디를 다시 패러디한 ‘투표부대’를 내놨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각국의 참전 독려 포스터에 ‘우리는 무적의 투표부대이다. 총선 일에 놀러가는 짓은 우리에게 사치일 뿐이다’등의 문구를 합성했다. 디시폐인들은 2008년 촛불문화제에는 ‘우리는 무적의 김밥부대다’란 구호를 들고 나왔다. ‘김밥부대’를 최초로 제안한 아이디 ‘독신녀’는 현재 방송작가로 활동 중인 김진경 씨다. 그는 “디시에 몇 안 되는 ‘청정ㆍ개념갤’이라 자평할 만한 ‘음식-기타 갤러리’를 믿고 제안을 올렸다”고 말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5월26일부터 닷새 만에 318만원이 모였다. 6월1일 새벽, 김밥 1700줄과 생수를 촛불문화제 현장에 공수한 뒤 2차 모금에 돌입했다. 이번엔 닷새간 5700만원이 모였다. 6월10일, 김밥 1만 줄·생수 9천 병·초코바 5천 개를 들고 현장에 나갈 때는 ‘라이더스 갤’ 사람들이 스쿠터로 배달을 도왔다. 현장에서 ‘진중권갤’과 ‘이명박갤’ 사람들도 만났다. 디시인들은 이렇게 각자의 갤러리 깃발 아래 모였다. 김진경 씨는 “의사건 변호사건 디시에 들어오면 무조건 디시폐인이 돼버린다는 얘기가 있다. 2001년부터 디시폐인으로 지내다 보니 이제는 좀 훈훈한 갤을 찾게 된다”고 했다. ‘김밥부대’가 이슈가 되면서 ‘음식-기타 갤’에 악플러 등 불청객이 몰려들 수도 있지만 금세 다시 청정해질 거라 믿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