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영화 흥행은 감이 아니라 과학입니다.

녹색세상 2008. 3. 4. 18:14
 

 

오늘도 관객의 변화무쌍한 취향을 좇아 수많은 영화들이 전력질주하고 있다. ‘정도는 없다, 대박은 하늘이 낸다’, ‘흥행은 며느리도 모른다’, 뻔한 말이다. 하지만 영화 흥행에서 감(感)으로만 되는 일은 없다. 온전한 정답이 아니라도 근사치의 답을 찾기 위해 ‘과학적 흥행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포커스 그룹 인터뷰, 설문조사, 시사회 출구조사 등등등. 대통령 선거만큼은 아니지만 가능한 모든 가설, 조사들이 동원된다. 관객의 표심을 붙잡기 위한 한국영화계의 흥행의 과학, 그 신통방통한 노하우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흥행의 과학 1. 확실한 것도 검증하라


“<뜨거운 것이 좋아>는 타깃이 분명하잖아요. 젊은 여성 관객. 영화 설정이 정말 여성 관객이 공감하고 즐길 만한 것인지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어요. 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에 부탁해 20대, 30대 여성 5,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죠. 그런 식으로 조사하는 게 흔하지 않거든요. 2007년 한국판 ‘킨제이 보고서’를 만들어보자 했죠. 질문이요? 첫 키스와 첫 섹스, 첫 섹스에 대한 만족도, 양다리 경험, 오르가슴 경험의 유무, ‘원나잇스탠드’ 경험 등등, 43개 문항이에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헤어진 남자친구와 다시 만나 덜컥 섹스를 하게 된 극중 아미(김민희)의 상황을 빗댄 ‘귀하는 사귀던 사람과 헤어진 후 그 사람과 섹스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 맞선에서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영화 내용을 염두에 둔 ‘원나잇스탠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나잇스탠드로 만난 사람과 연인 또는 부부로 발전한 적이 있습니까?’ 같은 질문도 있다. 적극적인 연하남과 사랑의 줄다리기를 펼치는 영미(이미숙)에 대한 관객 반응은 ‘연하남을 사귀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연하남과 연애를 해보고 싶은 이유와 그러고 싶지 않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같은 질문으로 연결됐다.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의 흐름과 질문 내용이 세세하게 연결되고 있었다.


흥행의 과학 2. 정확하게 적용하라


“9년 동안 시나리오 모니터 요원을 뽑았어요. 1년에 2~4차례에 걸쳐서 30~40명의 모니터 요원을 뽑고 시나리오를 읽게 해요. 다 읽고 나서 설문을 하는데 줄거리, 캐릭터에 대한 호감 여부를 묻는 질문을 12~13개 정도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는 다 비슷비슷하죠. 영화 보는 눈도 거기서 거기고요. 그런데도 90% 넘는 만족도를 보이는 시나리오는 흔치 않아요. 설 연휴 개봉한 ‘원스어폰어타임’은 시나리오 반응이 좋았죠. ‘음란서생’은 거의 100%에 육박하는 최고 기록을 냈습니다. ‘엽기적인 그녀, 첫사랑 사수궐기대회’도 좋았죠. 시나리오 모니터링 반응이 별로였는데 밀어붙인 건 ‘사랑 따윈 필요없어, 흡혈형사 나도열, 아파트’ 정도. 신뢰도요? 모니터링 자체는 충실히 하지만 맹신하진 않아요. 그게 다는 아니거든요. 시나리오의 허점도 배우와 감독의 조합, 패키징으로 극복할 수 있어요. 패키징에 믿음이 생기면 가는 거죠.”

 

 

모니터링을 끝낸 시나리오는 촬영 후 다시 한 번 검증을 거친다. 빠르면 사운드나 CG가 완성되지 않았지만 대략의 스토리를 잡아갈 수 있는 1차 편집본이 완성됐을 때, 늦어도 프린트가 찍히기 전에 모니터 시사회를 시작한다. 이때 주어지는 설문지엔 시나리오 모니터링 때보다 훨씬 더 세부적인 질문, 장점보다 단점에 대한 질문이 주로 담겨 있다. 아쉬운 점, 공감 안 되는 장면, 지루한 장면, 재미없는 캐릭터에 대한 가차 없는 평가가 차곡차곡 쌓인다. 이 냉혹한 X파일이 제작진에게 전달되면 재미있는 부분은 분량을 늘리고, 재미없는 부분은 덜어낸다. 반복 편집을 거치면서 모니터 시사회도 몇 차례 계속된다.


흥행의 과학 3. 수치를 믿어라.


“할리우드에선 리서치를 잘 안 해요. 영화산업의 역사가 깊으니 힘이 있는 거죠. 한국은 3~4년 전부터 시작했는데, 보편화는 최근에 된 것 같아요. 대작들에 크게 쏟아 붓고 크게 망하기 시작했는데, 대기업에서는 망한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각 단계별로 리서치가 시작되고 영화의 다양한 부분을 수치화, 계량화한 거죠. 초창기엔 영화계에서 거부감이 없지 않았어요. 영화산업 규모에 비추어 비용이 많이 드는 문제도 있지만 창작이라는 특수성 때문이죠. 창작은 계량화하기 힘들다는 생각. 그래도 신뢰할 수 있는 리서치 방식과 표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예요. 제작비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예전처럼 좀 망해도 괜찮은 수준이 아니잖아요?”


단계별 리서치를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한 건 이 분야의 선두주자인 CJ엔터테인먼트다. CJ 콘텐츠개발팀은 영화의 모든 것을 수치화, 계량화하는 방식을 시스템화했다. 자동차, 핸드폰, 하다못해 라면이라면 모를까. 영화를 보는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수로 표시한단 말인가? 광고계에서 영화계로 이직하면서 다양한 리서치 방법을 도입한 임상진 팀장은 그 심오한 메커니즘을 이렇게 해설한다. 시나리오 모니터링, 포커스 그룹 인터뷰(FGI), 편집본 모니터링, 위클리 서베이(주 단위 조사)를 기본으로 하는데, 단계별 조사방식이 촘촘하게 짜여진다. 특히 FGI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한다. 시나리오, 영화의 매체성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이다.


흥행의 과학 4. 데이터에 입각한 기획을 하라


“영화 마케팅을 거의 10년 동안 하면서 축적된 자료가 있어요. 주 단위로 스코어를 기록한 자료, 그리고 첫날 대비 주말 몇 프로 관객증가 같은 것들을 수치화해서 우리 회사만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죠. 이게 다 사례연구가 돼요. 영화의 성격이나 장르에 따라서 비슷한 추이가 나타나는 것으로 적용할 수 있거든요. 예컨대 일본영화 <데스노트> 시리즈가 흥행했다고 쳐요. 그런데 그 스핀오프인 <데스노트L>이 개봉하는데, 이미 전편에서 수집했던 자료를 다시 활용할 수 있는 거죠. <데스노트> 개봉 당시 10대들이 어떻게 열광했는지, 영화에 대한 반응은 어땠는지 자료가 있으니까.”


데이터베이스는 각 회사의 필살기다. 얼마나 체계적으로 데이터를 축적하느냐는 자사 노하우와 직결되는 문제라 좀처럼 밝히기를 꺼리는 부분이다. 요즘이 데이터베이스의 중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시점인 것만은 분명하다. 영화홍보사 올댓시네마는 올해부터 분기별로 ‘트렌드 패널’ 조사를 계획하고 있다. 20대, 30대들의 취향과 관심사를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무슨 TV 프로그램, 가수, 드라마를 좋아하는지. 어떤 캐릭터를, 왜 좋아하는지, 영화 외적인 부분까지 아우르는 트렌드 파악이 중요해요.”

 

 

흥행의 과학 5. 변수를 예측하고 통제하라


“차승원 씨가 진지한 멜로 주인공으로 변신한 <국경의 남쪽>은 평가가 참 좋았어요. 하지만 관객들은 차승원의 변신을 받아들이지 못했죠. 개봉 전후로 차승원 씨가 모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 몸짱 이미지, 개그맨을 웃기는 배우라는 이미지를 보여준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고 봐요. 의도와 달리 영화 속 순수한 북한 청년과 맞지 않는 이미지가 노출됐고 그 인상이 영화 몰입을 방해했을 가능성도 크죠.”


변수는 언제나 있다. 영화 안은 물론 바깥에서 돌출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배우가 허위학력 소동에 휘말리기도 하고, 스캔들이 터져 인기가 급락하기도 한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그림을 그린 뒤에도 “운이 따라줘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예측 불가능 변수 때문이다. 변수를 적절히 예측하고 통제하는 것도 흥행 과학의 불문율이다. 이 밖에도 사회적 이슈와 사건, 사고, 유행에도 영향을 받는다. 대선을 전후로 정치영화가 대거 등장하거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흥행세가 때마침 터진 핸드볼 붐을 타고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이 예가 될 수 있다. 한국영화가 모질게 힘든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지금, 근거가 박약한 대박의 꿈은 환상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꼼꼼하게 자료를 모아 위험을 최소화하고 가능성을 최대화하는 메커니즘을 개발한다면, 그 모든 것이 허망한 신기루만은 아니다. (필름 2.0/송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