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중

이천 화재 원인과 건강불평등

녹색세상 2008. 1. 17. 12:42
 

경제공황 10년은 사회불평등의 심화, 건강불평등의 심화

 

 


  연일 터지는 대형 사고는 거의 인재인데, 그 발생 양상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재래적인 재해의 양상을 보이고 있어, 우리가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혼돈스러울 지경이다. 이천 코리아 냉동창고 화재도 그러하다. 비좁고, 화재위험이 높은 작업환경 속에서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변을 당했다. 삼성재벌의 권위에 눌려 아직 조사조차 못하고 있는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백혈병 사망 사례도 이미 법으로 금지된 벤젠이며 유기화합물 등, 구시대적인 유해물질에 폭로되어서 발생된 재래형 사망사고인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이전으로 퇴보해버린 노동현장 속에서, 자본가의 구시대적 폭력에 의해, 노동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 사회는 급변하고, 발전한다고 하는데,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사는 곳은 왜 이렇게 구시대적으로 퇴보했는가? 사회불평등 심화 때문이다. 경제공황 시기에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건강형평성정책’을 중심정책으로 내걸었던 정부이다. 특히, 2002년도에 노무현 정부는 ‘국민건강증진합계획’의 최종목표를 ‘건강형평성 확보’에 두었다. 그런데, 건강불평등은 심화되고 있고, 정부의 정책은 앵무새의 소리보다도 작다. 이렇듯 경제공황 10년은 사회 불평등 심화와 건강불평등 심화의 역사였다. 건강불평등의 심화는, 메두사의 머리처럼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우리를 끝없는 슬픔과 고통의 지경으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가 기가 막혀하고, 분노하는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망사고나, 삼성공장의 백혈병 사망사례들은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건강불평등 심화로 인하여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에 불과하다. 2003년 노무현정부가 그토록 자신 있어 하고 당당하게 내걸었던 건강형평성 정책, 가장 중요한 목표중의 하나가 여명을 연장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로 돌아가고 있으며, 돌아도 엄청나게 돌아가고 있다. 경제공황 이후 여명의 사회적 차이는 증가하여, 높은 사회계급 집단에서는 이미 목표하는 여명에 도달했을지라도, 낮은 사회계급의 집단에서는 높은 사회계급 집단에 비해서 여명이 상대적으로 증가하고 있지 못하여, 여명의 사회적 차이가 점차 벌어지고 있다.


불평등 심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경제공황 이후의 우리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의 역사였다. 부르주아정권은 누가 집권을 해도 차이가 없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간은 ‘눈 가리는 신자유주의’를 폈다면, 이명박 차기정부는 그 태생조차 자본가계급 관리자로써, 이미 친자본, 기업우선 전략과 민영화전략에서 드러나듯이, ‘거침없는 신자유주의’로 가고 있다는 것, 그것이 유일한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면, 경제공황의 위기 속에서 어떻게 불평등이 심화되었는가?


1997년 말 폭발한 한국경제 위기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 전략이 전면화 된 계기가 되었다.(이은숙, 2003). ‘김대중 정부는 세계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를 주도하고 있는 초국적자본과 그 이해 대변체로 기능하고 있는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제공받는 대신 그들이 요구하는 내용들, 곧 신자유주의 전략에 입각한 정책수단들을 대폭 수용함으로써 한국경제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였다.(이은숙, 2003)


노무현 정부는 어떠한가? 노무현정권은 김대중정권과 동일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즉, 신자유주의 정책의 연장이었다.(김명록, 2004) 이렇듯, 경제공황 10년은 사회불평등이 심화되는 호 결정적인 시기였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은 경제공황의 시기에 ‘독점자본의 과잉자본을 국가기관에 의한 부실채권 인수, 금융자본에 대한 증자, 예금대지급 등의 방식을 이용하여 국가가 책임을 지고, 이에 필요한 비용을 사회 전체로 전가’시켰고, 사적 독점자본의 실패를 민중들의 소득으로 보상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즉, 가장 반민중적, 친자본적으로 국가에 의한 과잉자본을 처리함으로써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극을 달렸다.(김명록, 2004)


또한 독점자본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상대적 과잉인구의 창출, 노동권의 약화 등을 통해서 자본축적의 조건을 형성하였다. 독점자본은 ‘독점자본간의 세계적인 경쟁체제에 의해서 가해지는 압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공장이전 등을 무기로 노동권과 환경권, 민중의 생존권을 악화시켰다. 이리하여, 자본의 세계적 경쟁압력과 자본의 이동성의 증가는 한국의 자본가로 하여금 모든 노동을 지구상에서 가장 열악한 노동조건에 기준을 맞추게 했고, 결국, 노동자집단의 하향평준화로 귀결되었다.(김명록, 2004)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는 생산을 위한 비용에 대한 고려를 안 한다는 것이다. 직업불안정성, 노동강도, 재해 등의 위험을 간과함으로써 전반적인 삶의 질이 악화되고 있다. 상품 위주의 경제체제 하에서는 삶의 질과 관련된 비용이 무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결과, 삶이 파탄이 나고, 노동과정동안의 삶의 질이 과로노동의 위험과 직업불안정성으로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Robert Karasek, 1999)


  그러면, 경제공황 이후, 작업장의 노동환경은 어떻게 황폐화되었는가? 김대중정권 시기인 1998년 도입된 [파견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 소위 파견법]으로 전체 노동자의 50-60%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했으며, 2006년 노무현정권 시기에 또 다시 노동법개악으로 인하여, 이제 비정규직이 고착화된 노동자들이 1년마다 직장을 옮겨다녀야 하는 반(50%)은 실업상태요 반(50%)은 고용상태인 반(半)실업 노동자가 증가하고 있다.


  즉, 1998년 이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대량의 노동자의 해고와 산업예비군의 증가 및 일부 산업예비군의 비정규직으로의 흡수과정이었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저임금구조와 노동 강도 속에서 건강의 황폐화를 겪게 된다. 노동 강도 강화의 근원은 저임금구조이다. 저임금구조 하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밀도를 증가시키지 않을 수 없고, 장시간의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노동 강도를 강화시키는 촉진요인은 고용불안이다. 고용불안은 정규직 노동자의 감축과 원래 정규직 인원보다 더 적은 인원으로 채워지게 된 비정규직 노동자로부터 발생한다. 이렇게 정규직 노동자를 대신하여 들어오게 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잘리지 않도록 하기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자발적으로 노동 강도를 강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즉, 저임금구조와 불안전한 고용구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로 하여금 장시간의 노동과 노동밀도가 조밀한 노동을 통하여 강화된 노동을 하게 강요하고 있으며, 이러한 노동강도 강화로 인하여 사망사고, 재해, 근골격계질환 증대, 직무스트레스 및 피로도의 증대, 일상생활에서의 건강장해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경제공황 이후 10년 동안 우리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불안정노동증가, 노동강도 강화, 빈곤심화, 사회계급 불평등심화, 건강불평등 심화로 연결된 악순환의 연결고리 속에 있었다.


노동시간단축운동-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에서 해방되어

 

 

  사회 불평등 심화와 건강불평등 심화,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우선 실질적인 노동시간 단축투쟁이 되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과도한 노동시간에 시달리다 보면, 자유로운 시간은 유일하게 잠자는 시간일 것이다. 새벽과 밤 시간도 출퇴근시간으로 빼앗기지 않고 않는가? 이러한 상태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계급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젖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특히 자본가들이 자본가끼리의 경쟁에서 밀려서 고전을 면치 못할 때에, 간혹 일부 노동조합에서 절대로 화해할 수 없는 자본가계급과 화합과 조화의 시대를 열어가기도 하는데, 이는 바로 노동조합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장시간의 노동시간이 만들어낸 ‘후유증’이 아닐까? 특히, 1997/8년 경제공황이 발생되었을 때,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얼마나 노동자들이 피땀을 흘렸던가? 장시간의 노동을 하면 할수록 노동자에게는 득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신체가 망가지고 생명만 단축될 뿐이다.


  현재, 금속연맹에서는 제조업체 노동자들의 12시간 주야맞교대 근무를 해소하기위해 ‘주간연속 8시간노동제’를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교대제 자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가 아니라, 실질적인 노동시간 단축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매년 생산력이 증가한 부분에 대한 실질적인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투쟁을 해나가야 하며, 자본가계급에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노동시간연장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또한 나 외의 다른 노동자들이 장시간의 노동을 하는 것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노동시간 단축투쟁은 새로운 변혁운동의 기본이다.(맑스, 자본론, 1989) 노동시간 단축투쟁은 자본의 계급투쟁에 대한 노동의 계급투쟁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더 나아가, 노동시간 단축투쟁은 단지, 노동시간 단축만이 아니라, 그 내용도 바뀌어야 한다. 즉, 노동시간 단축이 소득보장 및 생활수준의 문제, 그리고 실직들의 문제에만 연계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의 24시간 시간들은 이제 노동-시간으로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는 삶-시간들로 배치되어야 한다.(고길섶 2004)


  이제, 노동시간 단축투쟁을 전사회적으로 확산시켜서, 총자본에 대항해 나가는 투쟁으로 확대발전시켜나가야 할 때이다. 그리고 노동시간투쟁의 의제를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과제의 영역으로 확산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노동시간을 지금의 절반으로, 즉 12시간의 절반인 6시간으로 줄이자!!.


강도 높은 노동에 강력하게 저항하라


  ‘노동 강도 강화’는 미덕으로 칭송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과도한 노동에 대한 관대함이 있었다. 우리의 이웃들은 ‘하루에 10시간 이상 노동을 해야 한다’고 말해야 나를 인정해주었듯이, 어쩌다 하루, 아침에 좀 늦다 싶으면 일하러 안가도 되느냐? 하면서 걱정하듯이 말이다. 나 자신도 10분을 놀고 있으면 나태함이 밀려오나? 하고 불안해진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5일 근무제 이후 시간은 많은데, 돈은 없어서 갈 데도 없고, 죽치고 집에 있자니, 죽겠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우리의 자화상일 것이다.


  사회적 풍토로써 과도한 노동이 권장되는 것은 우리가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무심히 받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시대는 노동에 의한 착취가 사회의 부의 원천을 이루기 때문에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이 일을 많이 할수록 좋은 게 아닌가? 이 사회에서 우리가 취할 것은 돈보다 시간일 것이다. 우리가 임금 대신 또는 소득 대신 시간을 벌었다면, 이 시대에서는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리라. 그 벌어놓은 시간을 가지고, 산과 들에도 맨발로 뛰어가보고, 주변의 동지들을 만나다 보면 구체적인 방도가 생길 것이다. 세상을 어떻게 변혁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뜻있는 운동의 시간을 늘려나가세


  시간이 남아돌면, 할 일이 없는가? 만약 나에게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처음 며칠간은 어리벙벙해서 이런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일생을 자본가계급을 위한 노동 속에서 지내다보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을 위한 사적노동’에서 벗어나서, 우리의 삶을 조직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한 발을 내딛어야 한다. (참세상/손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