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추악한 미술판을 무엇으로 덮을 것인가?

녹색세상 2007. 10. 13. 12:50
 

  권력형 비리로 번진 신정아씨 학위 위조 사건의 회오리바람은 미술동네 곳곳의 허물을 낱낱이 벗겨놓았다. 누드 사진 공개 파문까지 터진 젊은 큐레이터의 가짜 박사 사칭, 청와대 고위 공직자인 번양균과의 유착, 미술관 기업 후원금 거액 유치 의혹 등 스캔들의 주 무대가 대부분 미술판이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회오리가 커지면서 초라한 알몸으로 남은 미술동네의 자화상은 환부 투성이였다. 대형 비엔날레의 운영 주도권을 둘러싼 미술계 권력 갈등, 비엔날레 위에 군림하는 지방자치단체, 구설수의 온상인 기업의 미술 후원, 접대와 밀어주기 관행에 길들여진 미술언론, 최악의 처우를 최상의 가식으로 포장한 큐레이터 직종의 기만적 양면성 등이 줄줄이 세인들의 입담에 오르내렸다. 미술계가 총체적인 비리의 온상으로 지목되는 치욕스런 상황이지만, 실질적으로 이를 변호하고 문제를 개혁할 역량조차 거의 없다는 점에서 미술인들의 절망감은 더욱 커 보인다.


 

 

지자체·이사회 눈 밖에 나면 배제?


  아시아의 대표적인 국제 미술제로 자처해온 광주비엔날레는 신정아 파문의 장기화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전 청와대 정책실장 변양균씨와 신정아씨의 유착관계가 사실로 드러나면서 권력형 비리 스캔들로 커지자 외압 의혹 속에 신씨의 예술 감독 선임 철회로 입은 상처는 더욱 깊어졌다. 변씨의 비엔날레 외압 의혹의 실체는 아직도 결정적인 증언이 나오지 않은 가운데, 현재 구속되어 있지만 검찰 수사와 법원의 최종 판결을 지켜봐야 한다.


  신정아씨의 비상식적인 예술감독 선임 과정은 추천자, 선임 과정의 외압 여부 등이 줄곧 여론의 관심거리였지만, 미술인들은 그에 못지않게 이 과정에서 이른바 ‘미술정치’로 불리는 문화권력 다툼, 곧 비엔날레 주도권을 놓고 지역과 성향에 따라 엇갈리는 이해관계를 지닌 미술계 인사들과 광주 지자체 사이의 갈등 양상이 삐져나왔다는 점을 주시하고 있다. 지난 7월 초 신정아씨가 광주비엔날레 감독으로 선임될 당시 선정위원들이 추천한 후보들을 재단 쪽이 낙점하는 과정에서 보수, 진보 성향 미술인과 중앙ㆍ광주의 지역 미술인들 사이의 물밑 갈등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특히 한갑수 전 이사장의 최종 예술 감독 후보 선정 과정에서 신정아씨와 함께 마지막까지 남은 중견기획자 박만우, 이영철씨가 탈락한 배경을 놓고 이런 미술정치적 맥락의 해석이 나오고 있다. 예술 감독 선임 과정에서 김승덕씨와 더불어 선정위원회가 5월22일 2차 선정 과정에서 압축한 최종 후보에 올랐던 박만우씨의 경우 상당수 위원들은 최고점자가 고사해 차점자인 그가 최종 낙점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단 쪽은 그를 단독 후보로 심사하지 않고, 추천자 9명을 다시 이사장에게 올려 선정 권한을 위임했다. 이 과정에서 박씨는 광주보다 규모가 작은 부산비엔날레 감독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는 점과 사전 로비를 했다는 등의 일부 지적이 있어 탈락했다고 비엔날레 재단 쪽과 이사회 관계자들은 밝히고 있다.


  4회 비엔날레 당시 전시부장을 역임했고 광주에 살고 있는 그가 낙점에서 배제된 데는 국제기획자인 그가 광주 미술인들을 제대로 챙기지 않는 데 대한 반발과 그를 운동권 실세로 보는 현지 문화계의 부정적 여론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씨는 “전화로 인사 정도 한 것을 갖고 로비를 했다고 몰아세우는 것은 억측에 불과하다. 지역미술계에서 운동권 민예총 출신이라고 몰며 노골적인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배제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역시 최종 후보에 올랐던 이영철 계원조형예술학교 교수의 경우도 이런 미술정치의 파장이 작용한 경우로 해석된다. 2회 때 광주비엔날레 전시 기획실장을 역임한 이 교수는 광주 지자체와 보수적인 이사진들과 마찰을 빚어왔고, 현 비엔날레 체제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비판을 계속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현 이사로 유임된 이용우씨가 총감독을 맡았던 5회 비엔날레 개막 전에 이 교수의 부인이 이용우씨의 도덕적 자질을 비방하는 글을 인터넷에 유포한 사실이 드러나 공개 사과를 한 적도 있다. 한 전 이사장은 “이 교수를 면접했으나 과거 일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지 않았고, 그가 감독이 되면 나가겠다는 서울 쪽 이사들의 반응도 감안했다”고 말했다. 신씨보다 경력이나 역량 면에서 월등한 두 후보는 지역 미술계와 지자체, 비엔날레 재단 이사회 쪽과의 갈등 때문에 배제됐다는 분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총사퇴한 이사들, 80% 도로 유임


  재단이사장에게 전체 추천후보 선정 권한을 위임해 신정아 예술 감독 선임의 빌미를 내어준 3차 선임위원 회의 과정에 대해서도 선정위원들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각기 엇갈리는 말들을 하고 있다. 일부 위원들은 선정소위원장인 이종상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사장 위임안 쪽으로 의견을 몰아가는 분위기가 느껴졌다고 증언한다. 반면, 이 명예교수는 “하자가 없었다. 이사장에게 감독 후보 결정권을 위임한 것도 처음 이 제안에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던 일부 이사들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자고 건의해 이뤄진 것”이라며 “자기들이 통과를 주도해놓고는, 내가 위임안 쪽으로 회의 분위기를 몰아갔다고 주장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선정위원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종상 명예교수는 사실상 재단 쪽에 추천권만 있는 추천위원이라고 해석했으나, 다른 위원들 중 일부는 이번 감독 선정에서 선정 권한을 잃어버리고 결국 추천위원으로 전락했다는 식의 견해를 표출하고 있어, 스스로의 권한과 위상에 대해서도 견해가 엇갈리는 난맥상을 드러냈다. 특히 이사장 위임안은 외압 혹은 내부 선정위원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문외한인 이사장이 휘둘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선정위원들이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중론이다. 비전문가가 막후 자문을 받으면서 감독을 최종 선정하는 구도를 만든 것은 외압이나 특정 미술인의 입김이 작용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비엔날레의 실질적 관리자인 광주시의 안일한 대응도 냉소를 낳고 있다. 명예이사장 박광태 시장을 포함한 당연직 이사들은 지난 7월18일 신정아 예술감독 선임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한 뒤, 8월3일 자신들이 새 이사회를 짜서 80%를 유임시켰다. 8월14일 이사회 수습안을 내놓으면서 당연직 이사 수를 8명에서 시의회 의장과 상공회의소 의장을 뺀 6명으로 줄였고, 이사 연임을 두 차례로 제한하는 규정을 부활시켰으나 광주 지역 시민단체들은 최소한의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지자체의 비엔날레 운영 간여가 비엔날레 파행의 주된 원인이라며 이사회의 전면적 물갈이와 개혁을 주장해온 지역미술인들과 시민사회단체의 요구와는 상반되는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박광태 광주시장은 이사회의 전면 물갈이에 대해 “무책임한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밝혀 강행할 뜻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런 악재 속에서 1년 앞으로 다가온 비엔날레의 시계는 불투명해 보인다. 신정아씨의 예술 감독 선임 취소로 홀로 광주비엔날레를 맡게 된 외국인 감독 오쿠이 엔위저는 인문적 주제라는 강박에 눌린 기존 비엔날레의 틀을 깨겠다면서 아예 주제 없는 비엔날레를 치르겠다는 구상을 8월14일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미술계에서 이 주장에 선뜻 공감하거나, 기대감을 표시하는 인사들을 만나기 어렵다. 국내외 전문가들의 집중적인 조력을 받지 못한 채 1년 안에 파격적 얼개를 지향하는 기획전과 특별전을 치러야 한다는 부담이 적지 않다. 비엔날레를 1년 혹은 2년 정도 연기하자는 수습안이 나왔으나, 재단 쪽은 비엔날레 사이 기간에 디자인 비엔날레를 열고 있기 때문에 연기를 해도 준비할 역량이 없다며 강행 의사를 뚜렷이 했다.


평가와 검증은 못한 언론, 선정적 보도만


  중앙 미술계 쪽에서는 광주와 부산 비엔날레의 통합론, 발전적 폐지론까지 대두되면서, 광주시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비엔날레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주의가 더욱 확산되고 있는 분위기다. 신정아씨가 감독으로 선임된 원인을 낳은 추천후보들의 예상치 못한 잇따른 고사 사태도 그만큼 광주비엔날레의 위상이 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


  비엔날레와 더불어 미술을 다루는 일간지와 월간 전문지 등 미술저널들은 이번 사태의 배후로 가장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신정아 파문은 수 십여년 간 화랑가와 미술관에서 물어다주는 관급 정보에 사실상 일방적으로 기대어 유착관계를 형성해온 언론계 미술저널의 무기력증을 공론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두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신정아씨가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개 큐레이터인 자신이 명절 때 기자들에게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고, 고향 청송에서 직접 과일 등을 배송해 선물을 준비했다고 밝힌 부분은 미술과 언론의 부적절한 유착이 빚어내는 그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주요 중앙일간지들은 2000년 이래로 엄청난 분량의 신정아씨 관련 기사를 실었고, 칼럼 필자를 맡긴 것은 물론, 가짜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하는 기사까지 실었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은 <문화일보>의 신정아 누드 사진 게재 소동에서 보이듯 이 부분에 대해 성찰과 반성보다는 신씨의 행적과 문제점에 대한 선정적이고 공격적인 보도에 집중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종합일간지 가운데 신정아씨에 대한 온전한 평가와 검증이 부족했다고 반성하는 기사를 올린 곳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미술계의 인맥·학맥 구도와 연결돼 있는 미술 월간지도 눈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월간미술>의 경우 2003년 자사가 주최한 월간미술 전시기획 분야 대상을 신정아씨에게 주었다. 이 상은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에 신씨를 추천한 이종상씨가 기금을 출연한 상이다. 그가 신씨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계기로 알려진 이 월간미술 대상은, 상을 받은 전시가 사실상 해외에서 국내로 수입한 디자인 기획전이라는 점에서 심사 기준 등에 대한 의문을 낳은 바 있다. 그러나 <월간미술> 쪽은 당시 수상 과정에 대해 현재까지 일체 함구하고 있다. 

 

△ 신정아씨가 큐레이터로 근무했던 성곡미술관. 신정아 파문은 국내 큐레이터 사회의 양극화 실상을 까발렸다.


큐레이터 협회가 대안 될 진 미지수


  견습생으로 들어와 불과 10여 년 만에 위조된 학위를 내세워 비엔날레 예술 감독까지 넘본 신정아씨의 신출귀몰한 이력에서 보이듯, 신정아 파문은 허장성세로 먹고사는 국내 큐레이터 사회의 양극화 실상 또한 까발렸다. 상업화랑의 기획자와 사설미술관 큐레이터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개념이 정립돼 있지 않고, 사실상 화랑주 혹은 관장의 허드fp 심부름꾼으로 전락한 채 무급ㆍ저임의 전문성이 부족한 큐레이터들이 넘쳐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신정아 파문은 한국에서 큐레이터의 개념, 사회적 지위와 위상, 활동 영역 등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사태 뒤 국공립 미술관 기획자들을 중심으로 큐레이터 협회가 결성된 것은 그런 단적인 사례다. 다만, 큐레이터 협회를 결성했음에도 큐레이터의 잣대, 실질적인 구속력, 사용자 쪽인 미술관과의 관계 설정, 향후 진로 등에 대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국공립 박물관이 포함되지 않았고, 큐레이터의 범주와 활동 범위 등에 대한 의견도 내부적으로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21/노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