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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기독교 이해를 위한 추천도서 8권

녹색세상 2007. 1. 20. 16:28

   

흔히들 성경이라고 말하는데 정확한 표현은 성서다. 성경이란 말은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한 후 성서를 경전으로 만들어 대중들과 멀리 떨어진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지어낸 표현임에도 정신 나간 기독교인들이 그 진의를 알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성서를 영한사전에 찾아보면 ‘The Book, 즉 책 중의 책’이라고 나와 있다. 책 중에 좋은 책이라고 말한다면 믿음 좋은 기독교인들이 난리를 치겠지만 사실이다. 뒤틀릴 때로 뒤틀려 엉터리 투성이인 기독교를 제자리로 갖다 놓기 위해 ‘예수의 길을 따라 가자’고 부르짖는 유상태가 권하는 책이 있어 퍼왔다. 인터넷에 올린 것은 ‘모든 정보는 공유 한다’는 생각을 이해하고 있음을 믿기에 승낙도 없이 마구(?) 퍼왔음을 필자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개인적으로 청년학생들에게는 안병무 박사의 ‘역사와 해석’도 같이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서문에서 저자 안병무는 “우린 성서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성서가 이미 자명한 것으로 이해할 때 성서 대신 아집에 빠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성서에 대한 시각 교정용으로 많이 읽히고 있으며 이 책으로 저자는 대박을 터뜨려 돈 좀 번 것으로 안다.^^ 오래된 책이라 구하기는 쉽지 않으나 기독교 전문서점에 가서 주문하면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종교만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닌 일반 교우라도, 성서와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기초 신학서적과 종교서적이 있다. 특히 교회에서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맡은 분들, 또는 구역장이나 교회학교 교사 등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아 봉사하는 분들이라면, 이 추천도서 8권을 꼭 읽어보시도록 권하고 싶다. 불과 8권의 책을 읽는 것으로 성서와 기독교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8권의 책들을 정독한다면, 적어도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고, 기독교라는 ‘세계종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기본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이 8권의 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일반 교우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너무 어렵지 않고, 신학적으로도 너무 전문적이지 않은 책을 고르려고 노력하였다. (개인적으로, <예수 세미나> 학자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책을 추천하고 싶기도 하지만, 너무 방대하고 유동적인 그들의 연구과정을 정리, 정립하는 데 좀 더 시간이 필요하여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이 글은 인터넷 카페 <불거토피아>에 공지로 올려 이미 천여 명의 회원들이 읽었다. 그럼에도 조금 정리하여 다시 소개하는 이유는, 이 책들이 갖고 있는 내용과 호소력이 한국교회 교우들을 바람직한 신앙으로 안내하는 데 중요한 재료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판된 지 오래된 책이 있어, 일부 단종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 ‘성경의 형성사’ 박창환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출간.


저자는 이 책의 서론에서 “성서를 중심으로 하고 성서의 말씀을 따라서 산다고 하는 한국의 교회가 실제로는 성서의 정신과 엄청나게 배치되는 태도와 생활을 갖고 있다.”고 진단하며, 그 이유로 다음 몇 가지를 들고 있다.


1) 한국 교회는 성서를 읽는 것 그 자체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 것같이 가르치고 있다. 무조건 읽기만 하면 되고, 뜻을 알든지 모르든지 많이 읽고 매일 읽기만 하면 그 자체가 어떤 공적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읽는다. 이를테면 성서를 많이 읽음으로써 비록 그 뜻은 모른다 하더라도 어느 책에 무슨 말씀이 있고,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정도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성서 지식만으로는 신자의 생활에까지 영향을 주기가 어렵다.


2)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읽기는 하지만 바른 성서관을 갖지 못하고 읽기 때문에 여러 가지 괴상한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만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약장에 들어 있는 것은 다 약이요 병을 고치는 데 쓰는 것이라고 단정해버리고, 어떤 병이 나든지 차별 없이 아무 약이나 마구 사용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 일반이 이와 같은 성서 개론적 배려와 연구 없이, 일차원적으로 어디서나 성구를 끌어다가 아무렇게나 적당히 생활에 결부시키고 적용하는 습관이 있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성서를 읽는 사람마다 각양각색으로 판단하고 적용하기 때문에 교회에는 물론 사회에까지 혼란을 가져다주는 결과가 나타났다.


3) 이러한 현상은 교회 지도자들이 깊은 성서 신학적 연구 없이 한 가지 처방의 약으로 만병을 통치하려 드는 의사처럼, 제 나름의 해석과 제 나름의 처방을 가지고 교회를 지도해 온 데에서도 기인한다. 사람을 살리고 인간의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 되도록 주신 그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도리어 교회 분쟁과 분열의 도구가 되고 그 원인이 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딱한 일인가!


이 책은 장로회신학대학 학장을 지낸 저자가 일반 교우, 특히 교회학교 교사를 염두에 두고 쓴 책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염려하여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최소한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초 성서신학’을 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이전과는 달리 성경을 보는 눈이 새롭게 뜨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이 문자의 한계를 넘어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2. ‘예수는 없다’  오강남 지음. 현암사  출간. 


이 책은 수 년 전, 베스트셀러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한국 교계에서 한창 문제가 되었던 책이다. 성경이 어떤 책이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쉽고 명쾌한 비유로 정곡을 찔러 설명한다. 그러나 보수(복음)적인 교회에서는 금서로 규정하고 있다. 집필 당시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저자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매우 쉽고 평이한 문체로 이 책을 썼다. 어린이가 읽어도 이해할 만큼 글의 흐름이나 예화가 쉽고 재미있지만, 그 신학적 깊이에 있어서는 어느 전문적인 신학서적 못지않은 심오한 깊이를 갖고 있다. 이 책의 경솔한(?) 제목 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았다. 오강남 교수가 직접 채택한 제목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식(‘있다 없다’)의 흑백논리를 누구보다 싫어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마 출판사에서 제안한 제목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목 앞에 생략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우리가 지금까지 제멋대로 규정지어 믿어온 그런) 예수는 없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문체와 적절하고도 정곡을 찌르는 비유로, 난해한 신학적, 종교적 문제의 핵심을 명쾌하고 쉽게 설명한다. 흥미진진하게 읽어가다 보면, 성경이라는 책 속에 담겨진 ‘사람의 언어’가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이 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오는지, 혹은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는 성경 구절들이 어떻게 우리를 죽이는 ‘죽음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그 양면성에 대한 통찰을 자연스럽게 갖게 해 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첫 단행본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를 쓸 때, 빼어난 두 글쟁이들의 글쓰는 방식을 벤치마킹해 보려고 했다. <로마인 이야기> (이 책을 아직 안 보신 분은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특히 인생과 세상을 알고자 하는 젊은이라면)를 쓴 시오노 나나미 여사와 <예수는 없다>를 집필한 오강남 교수다. 그들처럼 쉽고 간결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쉽고 재미있고 명쾌한 이야기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물론 그 두 분의 글쟁이를 따라가기에는 너무 버거웠음이 증명되었지만.


3. ‘이스라엘의 역사’ 데이비드 F. 힌슨 지음. 이후정 옮김. 


이 책은 루터교 출판사인 컨콜디아사에서 발행한 <구약성서 입문> 시리이즈 세 권 가운데 첫 번째 책이다. 성서를 연구할 때, text와 context를 함께 연구하지 않으면 그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다. text는 성서의 본문이다. context는 그 본문이 쓰여 진 배경, 즉 역사적 상황이나 저자가 처한 환경, 글을 쓰게 된 의도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경과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본문만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성서가 쓰여 진 동기와 배경, 저자에 대한 연구 없이, 오로지 성서만을 100독, 200독 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로부터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쉽게 만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구약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성서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이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실제적 역사와 무관하게 형성되어진 구약성서들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책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책은 구약성서를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한 개론서이다. 이 책을 공부하면 이스라엘 역사를 관통하여 구약의 흐름이 시대별로 이해될 뿐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와 세계 역사의 관계도 대략 파악이 된다. 구약을 공부할 때마다 두고두고 유익한 자산이 될 것이다. 성서와 우리와의 시대적 간격은 2~3천년에 이른다. 또한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경험한 삶의 자리와 우리와의 공간적 간격 또한 그 못지않다. 그 간격을 무시하고 구약성서를 읽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책을 읽지 않고는 구약성서를 읽지 말라. 그것은 어린아이에게 칼을 쥐어주는 것과 같다.”


 4. ‘구약성서 39권’ 데이비드 F. 힌슨 지음. 이후정 옮김.


앞서 소개한 컨콜디아사 발행 ;구약성서 입문‘ 시리이즈 세 권 가운데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은 구약성서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상세한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그 토대 위에, 두 번째 책은 문학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구약성서 각 권의 내용에 대한 이해력을 갖게 해 준다. 책읽기를 싫어하는 분이라면, 첫 번째 책인 ’이스라엘의 역사‘만 정독해도 좋겠다. 그러나 기왕에 내친걸음이니 ‘구약성서 39권’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저자는 독자들이 구약성서 각 책들에 대한 주요 핵심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필치로 서술했고,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각 책을 소개하고 있다. 각 책들의 역사적 배경, 기록 유형, 개요, 자료, 메시지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본서는 독자들에게 성서 전체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 줄 것이다.” 이 책의 감수자인 민영진 박사의 말이다. 저자 자신의 신학적 입장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 입문서는 구약성서의 저자들과 그들의 저작들에 관하여 학자들 가운데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으며 올바른 해석을 위한 입문으로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기본적인 견해들을 진술하고 있다.”


5. ‘구약성서 신학’ 데이비드 F. 힌슨 지음. 이후정 옮김. 컨콜디아사 발간.


이 책은 앞서 소개한 컨콜디아사 발행 <구약성서 입문> 시리이즈 세 권 가운데 마지막 책이다. 첫 번째 책은 구약성서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상세한 지식을, 두 번째 책은 문학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구약성서 각 권의 내용에 대한 이해력을 갖게 해 준다고 소개하였다. 이 책은 이런 토대 위에, 구약성서 전체를 흐르는 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킨 구약신학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약성서 39권’을 읽은 분은 이 책 역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첫 번째 책을 소개할 때, text와 context를 함께 연구하지 않고는 성서 본문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을 했는데, 그 실례를 하나 들어보고 싶다. 예를 들어, 엄마가 아이에게 “난 네가 정말 미워.”하고 말했다고 하자. context에 대한 이해가 없이 문자만 놓고 보면, 이 엄마는 자기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여인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엄마가 한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 엄마가 어떤 상황에서, 왜 이런 말을 했는지를, 즉 context를 알아야 한다.


가령 아이가 엄마 몰래 동생을 괴롭힌다거나 몰래 돈을 들고 나가 과자를 사먹거나 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런 좋지 않은 행동을 들킨 순간에, 엄마가 아이에게 한 말이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는가? 엄마가 밉다고 한 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 아이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선언한 것이 아니라, 아이의 특정한 행위로 말미암아 “그 때, 거기에서”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말을 해석할 때는, 시공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말씀이 아니라 “그 때 그 순간”의 정황아래서 표현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문자로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전히 내 사랑하는 자식이다.”라고 외치는 엄마의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context를 알지 못한 채, text만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이렇게 위험할 수 있다. 혹 “context가 그런 것이라면, text(본문)에만 집중해도 능히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예를 들어서 그렇지, 성서 안에는 그렇게 쉽게 가늠할 수 있는 context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 context를 알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의 경험으로도, 추론이나 명상으로도, 혹은 아무리 우리가 그 context를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도, 당시의 context를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오직 당시의 context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통해 진정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성서가 쓰인 context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오직 성서만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칼을  들고 노는 것과 같다. 신학을 외면한 채, 오로지 성서를 수십 독, 수백 독 독파하는 분들이 있다. 성서의 문자에 갇히는 지름길이 되겠다.


6.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길희성 지음. 분도출판사 펴냄.


이 책은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였던 에크하르트 (1260~1327)의 사상을 조명한 책이다. 저자 길희성 교수는 서양 중세시대를, 신학과 철학이 조화를 이루며 철학이 영성과 신비주의적 성격을 지닌 시대였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이 다시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각기 제 갈 길을 가게 되었고,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에서도 지성과 영성은 이질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서구 신학의 비극이며 현대 서구 사상이 겪고 있는 영적 빈곤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엑카르트는 인간 영혼과 하느님의 일치를 추구한 신비주의자로, 인간이 인격적 하느님을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위험성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의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에 대한 집착에서 인간의 집요한 욕망의 교묘한 작용을 간파하며,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체의 경건하고 선한 행위에서 뿌리 깊은 인간의 이기심을 읽었다. 그래서 그는 “신을 위해 신을 놓아버린다.”고 하였으며, “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암스트롱은 그의 저서 ‘신의 역사’(A History of God)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인격적 신 개념은 종교의 본질을 표현하지 못하며 단지 종교 발전의 한 단계를 나타낼 뿐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이러한 인격신 개념이 가지고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 범주를 넘어선 초월적 신 개념을 추구해 왔다.”고 말했다. 흔히 기독교는 인격신 개념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엑카르트는 그 개념을 돌파한다. 그는 하느님을 만물 안에서 만물을 움직이는 동력이며 만물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이는 인력과도 같다고 이해한다. 그에게 있어서 만물의 알파와 오메가는 창조주 하느님, 즉 삼위일체 내의 성부 하느님이 아니라 그보다도 더 궁극적이고 원초적인 신의 근저, 즉 신성 혹은 ‘하느님 너머의 하느님’(God beyond God)이다.


엑카르트는 신과 신성을 구분한다. 양자는 하늘과 땅처럼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신성은 모든 변화를 초월하는 실재 그 자체인 반면, 신은 피조물들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해체되는’, 말하자면 ‘상대적’ 존재이며, 신은 활동을 하지만 신성은 아무런 활동도 없는 고적한 실재라는 것이다. 이 신성의 세계는 삼위일체적 구도를 초월하는 더 깊은 세계이다. 이런 엑카르트의 사상은 당시 가톨릭 교리의 중심을 흔드는 것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조금 지나 가톨릭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선포되었다. 당시 교황 요한 22세가 공표한 발표문에는 엑카르트가 이단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필요 이상으로 알고자 했으며 신중하지 못했고 신앙의 원칙을 어겼다.” 이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 “신은 존재라기 보다는 지성이다.”


7. ‘일세기 교회’ 박태식 지음. 생활성서 펴냄.


“성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신적 계시의 책이므로 ‘기록된 그대로’ 읽으면 되었지, 무슨 비평적 해석이니 전승사 연구니 하는 인간적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특히 보수적인 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만을 열심히 읽는 사람은 ‘흔들림없는 확신’을 갖게 되는데, 이런 종류의 ‘확신’은 일명 ‘계시종교’라고 하는 유일신 종교 삼형제(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신자들이 갖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확신이 자신의 삶을 평안하고 안정된 삶으로 인도하는데 그친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계시 종교인들은 자기 신념체계를 절대화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다른 신념체계를 가진 사람과 대화하기 어렵고, 결국 상대방의 신념체계를 부정하기 쉬우며, 이 신념체계들이 어느 시점에 동일 공간에서 만나게 되면 치열한 전투(?)를 벌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이런 식의 갈등상을 부시와 빈 라덴, 혹은 부시 일당과 이슬람 테러리스트로 대별되는 근본주의자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진정 자기가 하는 일을 ‘신의 뜻’으로 확신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의 확신과는 달리, 그들의 신은 그들처럼 편협하지 않으며, 그들은 하느님 대신 자기 신념체계를 절대화하고 박제화 하여 믿고 있는 것으로, 그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깨달으려면, 기존의 기독교인들은 한 가지 전제를 잠시 유보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절대 계시의 책이다.”라는 전제에 대해 '정말 그럴까?'하고 한번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고, 성서가 어떤 책이며, 어떻게 쓰여 졌는지, 또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안내해 주는 좋은 책을 최소한 몇 권은 읽어보아야 한다.


지금 소개하는 책은, 성서에 대한 바른 이해로 안내해주는 매우 훌륭한 책들 가운데 하나다. 지은이가 우리 한국의 성공회 성직자이며, 매우 쉽고 명쾌하게 글을 썼으므로 전문 지식이 없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분량도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간편하게 쓰여 진 책이지만 기독교회가 태동하고 성장하게 된 배경과 신약성서가 기록된 동인을 일깨워주는 좋은 책이다. 책의 겉표지에는, 저자의 머리말이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2천 년 전의 상황은 달랐다. 당시 갓 탄생한 그리스도 교회는 세력 과시는커녕 어떻게 해서든지 명맥을 이어가야 하는 초라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일세기 교회는 아직 세공되지 않은 다이아몬드와 같이, 울퉁불퉁한 그 모습이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 신앙이 흘러나온 원천인 일세기 교회는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우리의 가슴을 절로 요동치게 한다.”


이 책을 통해서 정말 재미있고 스릴 있게 읽은 부분은, 예수의 문하생들(?)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암투(?) 부분이다. 바울학파와 베드로학파, 그리고 요한학파 사이의 삼국지를 방불케 하는 전투(?) 흔적이 지금도 성서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이 너무나도 재미있다.신약성서의 주요사상은, 결국 주도권을 거머쥔 바울학파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주축으로 하는 바울 서신의 중심사상인 ‘이신칭의’(믿음으로 구원을 얻음) 사상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 동인이 된 것이다. 거기에 요한학파(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의 사상과 베드로학파(야고보서, 베드로서 등)의 사상이 세 축을 이룬 채 균형을 이루며 신약성서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바울학파가 아닌, 다른 학파가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엉뚱한 상상을 한번 해 본다. 만약 베드로학파가 주도권을 쥐었다면, 아마도 오늘의 교회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독교회는 유대교의 주류로 부상하거나 아니면 정통 유대교에 흡수되지 않았을까. 요한학파가 실권을 쥐었다면, 초현실적인 종교가 되어 기독교의 크나큰 장점인 ‘역사성’ ‘사회성’은 상당히 후퇴했겠지만, 오늘날 바울이 세운 엄격한 교리로부터는 어느 정도 자유롭고 유연한 종교로 자리매김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성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라는 것, 그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를 알지 못하고는 성서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읽기는 읽어도 우리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지 못하고, 교리에 의해 딱딱하게 굳어진 ‘사망의 언어’(생명의 말씀이라 생각하지만)로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사망의 말씀이 오늘날 부시를 비롯한 수많은 네오콘을 낳아 죄 없는 생명을 죽이고 있다.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성서가 쓰여 진 바로 그 시대, 서기 1세기의 상황과 교회의 실존을 (비록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적어도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파악한 부분까지는) 어느 정도 진실 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 박태식 교수는 서강대 영어영문학과와 동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 공부할 때는 정양모 신부에게서, 그리고 독일에서는 G.스트레케 교수에게서 많은 도움과 가르침을 받았다.


8. ‘보살예수’ 길희성 지음. 현암사 펴냄.


서강대 종교학과 길희성 명예교수가 지난 2004년 봄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일요신학강좌’에서 강의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내용을 담은책이다. 이 책은 기독교와 불교의 사상적 만남을 시도한 비교종교학 서적으로, 기존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발칙하고 불경스런 책으로 보일 수 있겠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종교학자로서 불교에 대한 깊은 학문적 연구 업적을 인정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타가 인정(근본주의자 제외)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인 저자가,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념체계에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신의 유일한 궁극계시자이며 구원의 유일한 중보자로 고백된 예수를, 중생 구제를 위해 성불을 마다한 대승불교의 보살에 비유함으로써, 기독교의 절대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상대적인 자리에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일련의 과정, 즉 예수가 수많은 보살 중의 하나가 되는 기독교의 상대화를 받아들여야 기독교가 복음의 원형을 되찾을 수 있고, 이웃종교와 나란히 어깨동무하며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길벗이 될 수 있으며, 인류사회의 갈등을 치유하며 공헌할 수 있다고 믿기에 이런 발칙한(?) 강의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종교상황에 놓인 현대 사회에서, 종교인이 자기 종교에만 몰입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불교와 같은 깨달음의 종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절대 신념체계로 무장한 종교, 특히 유일신 삼형제(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이웃종교를 존중하고 그 가르침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현대 사회에서 많은 갈등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다. 현대 비교종교학의 창시자라 일컬어지는 막스 쉘러의 말처럼, “하나의 종교만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도적인 악행’보다 더 무서운 것이 ‘선으로 착각하여 양심의 가책 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무지’다. 지금은 조금 뜸해졌지만, 미국에서 창궐한 네오콘 (미국의 부시 정권을 창출한 개신교 신근본주의자들)의 행태가 바로 그러하며, 그 근본주의 신앙을 그대로 전수받은 한국 주류 개신교의 행태 역시 그렇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길희성 교수의 <보살예수>는 참으로 시기적절한 때에 출간되었다고 생각되며,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읽어보도록 강력 추천하고 싶다. (유상태 글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