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달빛님으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자전거 타고 왔다고 신경 써서 챙겨 주시는 그 마음이 고맙기 그지없더군요. 알려주신 굴국밥집에 가서 맛있게 아침을 먹었습니다. 8시가 넘어 일어났으니 자전거 전국 일주 중 가장 늦게 일어난 날이 아닌가 싶군요. 선약이 있어 먼저 가시고, 저도 서둘러야 고령은 도착할 것 같아 술이 조금 덜 깬 상태에서 자전거를 밟았습니다. (이거 들키면 큰 일 나는데...) 마침 거창장날이라 읍내 곳곳에 판이 벌어지기 시작하더군요. 역시 농촌은 이런 맛이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 거창을 떠나 올 때 막 전을 펴기 시작한 거창장날의 한 장면, 농촌 5일장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하고 지나와 아쉬웠다.
이런 장면을 보면 본능적으로 사진기를 꺼내 몇 장 찍기 마련입니다. 자전거 여행의 최고 장점이 이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차로 그냥 지나가 버리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천천히 가다보면 이런저런 구경을 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차가운 날씨에도 장터에 와서 뭔가를 팔고 가야 하는 고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땀 흘려 일하면 최소한의 노후는 국가가 보장해 주는 그런 세상이 언제나 올지 갑갑합니다. 좌판을 펴고 앉아 있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니 코끝이 시큰해집니다.
거창을 벗어나 가조를 지나 합천으로 들어서는데 완전 고개 길만 보여 눈 앞이 캄캄해지더군요. 추풍령고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가파른 고개가 많아 ‘이러다 고령까지 가겠나’ 싶은 걱정이 앞섭니다. 거기에다 간간히 불어주는 바람이 저를 더 단련시켜주더군요. 어제 추풍령을 못 넘은 값을 톡톡히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합천댐이 들어서면서 그 옆으로 국도가 생겨 합천은 그야말로 고개만 늘려있는 동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곳과는 달리 몇 군데 휴게소가 있어 쉬어갈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죠.
▲ 합천댐 옆으로 난 가파른 고개 길.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 가야산 줄기인 합천을 실감케 했다. 전날 추풍령을 넘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지불한 셈이다.
고개를 너댓개 넘고 나니 정나미가 뚝 떨어지더군요. 그 중 한 곳은 얼마나 가파른지 자전거를 끌고 넘었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게 세상이치이듯 마지막 고개를 넘어 고령군에 들어서니 평지가 눈앞에 펼쳐져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차로만 다녔으니 길이 어떻게 변했는지 제대로 알리 만무하죠. 자전거 일주를 하는 덕분에 길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고령에 들어서니 평균 25킬로미터를 유지하며 달릴 수 있었습니다. 달리다 보니 가야대학교 앞까지 왔습니다.
허기진 배도 달래고 휴식도 취할 겸 막걸리집으로 갔습니다. 한 잔 마시고 나니 그냥 늘어지게 자고 싶은 생각만 들 뿐 만사가 귀찮더군요. 대낮에 여관에 들어갈 수는 없어 찜질방을 찾았더니 고령에는 없다고 해 허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쉬어야 하나 조금 더 고생해 금산재를 넘어 대구로 가야하나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는 길이니 금산재를 넘어 가보자’는 호기심이 발동해 새로 난 국도를 뒤로 하고 옛길인 재를 넘었습니다. 그런데, 경상도 일원에서 알아주는 금산재를 너무 가볍게 본 게 저의 실수였습니다.
자전거를 막 타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 날 일정을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서 아는 길이라고 달려든 게 잘못이었습니다. 이왕 들어선 길 그냥 달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부지런히 페달을 밟았습니다. 아무리 밟아도 주말이면 수시로 왔다가던 성산면 소재지가 보이지 않더군요. 여관이라도 보이면 바로 들어가련만 읍내를 벗어나니 눈이 보일리 만무하죠. 익숙한 성산면에 도착해 다방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좀 쉬고 나니 ‘대구가 바로 코앞인데 바로 가자’는 생각이 들어 다시 자전거를 탔습니다.
▲ 경상도 일원에서도 가파르기로 소문난 고령 금산재, 새로 국도가 나서 시내버스 말고는 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삭막한 길로 변하고 있다.
그런데 퇴근길이라 차는 쌩쌩 달리고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자주 다니는 길이지만 지친 몸인데다 짐도 잔뜩 실린 자전거라 여간 신경 쓰이지 않더군요. 옥포를 지나 화원에 들어서니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겨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화원 고개만 넘으면 대구시내라 조금 느긋하게 달렸습니다. 수시로 다닌 달서구 유천교가 눈앞에 보이자 ‘완주했다’는 안도감에 쾌재를 불렀습니다. 거창에서 대구까지 바로 달리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인근 식당에 들러 과메기 안주에 소주 한 잔 걸치며 ‘자전거 전국 일주’ 자축을 했습니다.
‘삽질 대신 일 자리를ㆍ언론악법 철폐’ 자전거 일주라는 저의 작은 몸부림이 이명박 정권이 저지르는 ‘언론악법 철폐’와 가장 저질인 ‘조선일보 절독’의 작은 불씨가 된다면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전 국토에 삽질을 해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장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하려면 ‘당장 삽질을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감히 말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뿐인데 지나는 곳마다 많은 분들의 과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빚갈이 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2009. 12. 16일 자전거 일주 43일 째)
추 신: 2,200킬로미터를 넘게 달리는 동안 지켜봐 주신 많은 민주시민 여러분들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며 마지막 완주에 후원해 주신 민주시민들과 행언연 회원 여러분들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낯선 길 안내해 주고 온갖 도움을 주신 진보신당의 동지들 도움이 많았습니다. 이명박 퇴진과 ‘조선일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몸을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기회 한 번 더 없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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