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몰아넣고 굴욕을 강요한 야만적인 협상
극한 대치로 치닫던 쌍용차 사태가 6일 협상을 통해 타결되면서 ‘강제 진압을 자제하고 평화적 해결’을 이끈 경찰의 역할을 언론이 부각시키고 있다. 경찰은 이미 물과 음식물을 차단 시켜 궁지에 몰아넣고 ‘얼마나 견디는지 보자’며 사정없이 밀어 붙였다. 최소한의 인권조차 사라진 ‘한국판 아우슈비츠’였다. 거기에다 전기마저 차단 시켜 암흑천지로 만들어 버렸다. 마지막 거점인 도장2공장을 완전 포위하고 시간을 끌며 온갖 압박을 병행하는 ‘강온 전략’으로 노조를 협상 자리로 오도록 굴복을 강요했다. 경찰의 본격적인 압박 작전은 사태 해결의 돌파구로 기대를 모은 두 번째 노사협상이 결렬되면서 시작됐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면적인 노조 압박에 나섰지만 도장2공장 강제 진압은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대화를 통한 사태 해결 가능성이 낮아지자 4~5일 이틀에 걸쳐 강력한 진압 작전을 펼쳐 도장2공장을 제외한 주변 시설물을 모두 장악해 더욱 숨통을 조였다. 낮이면 헬기가 저공비행으로 괴롭히고 발암물질 가득한 최루액을 사정없이 퍼부어댔다. 특공대원들이 탄 컨테이너를 도장2공장과 맞붙은 조립공장 옥상에 투입시키고 헬기로 강하 작전을 펼치며 장악, 주변 건물을 모두 경찰의 통제 아래 넣었다. 장기 파업으로 지친데다 물과 밥 조차 제대로 먹지 못한 노동자들이 경찰특수부대를 상대로 싸우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이틀 사이 파죽지세로 노조가 점거했던 시설물을 차례로 장악한 것을 보면 바로 도장2공장으로 진입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경찰은 잠시 멈추었다. 무엇보다 도장2공장에는 엄청난 인화물질이 보관돼 있어 공장 전체를 날려 버릴 ‘화약고’와도 같아 ‘제2용산 참사’의 위험 부담 때문에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광주항쟁 이후 가장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인 용산 철거민 참사로 사회적 비난과, 김석기 당시 경찰청장 내정자가 낙마하는 등 조직 전체가 후폭풍에 시달린 바 있어 강경 일변도의 진압을 피하자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고용과 가정까지 걱정하는 건방진 경기경찰청장
이런 가운데 “6일까지 자진해서 나오는 노조원에게는 최대한 선처하겠다.”는 조현오 경기지방경찰청장의 발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최후통첩으로 엄청난 협박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노조는 최후의 선택을 놓고 고민하다 점거 파업 77일째인 6일 사측에 대화를 제안했고 1시간여 만에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에 칼을 들이대며 ‘말 들어라’고 한 것이나 전혀 다르지 않다. 경기경찰청 관계자는 “안전이 담보될 수 있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 편 강온 전략이 먹혀든 것 같다”며 자화자찬에 빠져 굴욕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함께 살자’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당연한 요구조차 경찰 폭력으로 짓밟아 버렸다.
이제 검찰과 경찰은 극렬 가담자는 모두 ‘사법처리 하겠다’며 엄포를 놓고 있다. “10만 명의 일자리를 지킬 수 있다면 정도 희생은 충분히 감수하겠다.”는 경기지방경찰청장의 말은 노동자들의 인권이 안중에도 없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언제부터 경찰이 노동자들의 일자리까지 걱정했는지 오지랖도 넓다. ‘부모와 처자식 걱정하면 나오라’는 말까지 해대는 등 오만방자함의 극치를 달린다. 특공대 병력이 쓰러진 노동자들을 사정없이 짓밟는 것을 기자들이 묻자 ‘보고 받지 못했다’며 자신의 업무는 오리발 내미는 자가 노동자들의 가정을 걱정하니 너무 주제넘는 짓이다. 과잉 진압으로 소중한 생명을 짓밟은 대가는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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