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눈물의 계절’입니다. 추위에 얼고, 마음이 추워 울고, 내일이 불안한 사람들의 눈물이 많아지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겨울이 되면 우리의 카메라는, 우리의 PD들은 그 눈물을 향해 찬 거리로 나서곤 했습니다. 이 겨울에 PD들은 또 다시 찬 거리에 서있습니다. 그들의 손엔 카메라 대신 팻말이 들려있습니다. 인터뷰 질문 대신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의 관심사는 ‘추운 사람들’이 아니라 ‘방송장악 저지’입니다. ‘재벌방송 반대, 조중동 방송 반대’입니다. 어느 해보다 눈물이 많을 이 겨울, 카메라와 마이크는 그 눈물을 향할 여력이 없습니다.
▲ 누가 이들을 엄동설한에 거리로 나오게 했는가? 이명박 정권은 ‘언론 7대 악법’을 당장 접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거의 모든 언론의 시선은 사상 초유의 언론노조 총파업 현장에, 과거 유례없는 악법들을 통과시키고자 혈안이 된 국회에 쏠려있습니다. 언론의 관심을 가장 필요로 하는 때, 언론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사람들 때문에 작가들은 이 겨울 더욱 마음이 시립니다. 국민들로 하여금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웃게 해주던 ‘무한도전’의 결방만큼이나, 우리는 다가올 시사교양 프로그램들의 공백이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MBC 시사교양작가들은 언론노조의 파업을 지지합니다. 지금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다시는 저 거리의 추운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음을 예감하기 때문입니다. PD들이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영영 잃을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지난 1년간의 뼈아픈 경험들을 통해 배웠습니다. 시사교양프로그램의 최일선에서 있던 우리에게, 지난 1년은 자본권력이 지배하고 정치권력과 결탁하고 언론권력이 장악한 방송의 미래가 어떠할지를 비감하기에 차고도 넘친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집권여당이 ‘경제ㆍ산업 논리’를 앞세워 개정을 시도하고 있는 언론법이란, 결국 정치권력을 동원해 재벌과 보수 신문들에게 지상파 방송을 넘겨주겠다는 노골적인 의도에 다름 아닙니다. 저 언론법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그것은 곧 언론의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자본, 정치, 언론권력이 거꾸로 언론을 지배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갖게 됨을 의미합니다. 공영방송이라는 기치 아래 오직 언론인으로서의 양심과 상식에 의거해 프로그램을 만들어왔던 지난날과는 판이하게 다른 제작환경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로 나타날 프로그램이 어떠할지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 작가들이기에, 파업 현장에서 들려오는 저 구호가 사무치고 절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논리만이 프로그램 제작과정에 통용됐다면, ‘MBC스페셜’은 지구 온난화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20억 원이라는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북극의 눈물’을 만들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구촌의 인권과 평화를 지향하는 국제 시사프로그램 역시 ‘고환율 시대, 해외 제작비 절감’이라는 암초에 부딪쳐 이미 좌초했을 지도 모릅니다. 대기업이 방송사의 주인이 되는 순간, 생활환경감시프로그램 ‘불만제로’는 더 이상 이윤을 목적으로 소비자를 기만하는 기업들의 횡포를 문제 삼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한국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고 있는 보수언론들이 MBC를 소유하게 된다면, 18년 역사의 한 시사프로그램이 폐지 일 순위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겠지요.
정권이 다섯 번 바뀌는 동안 일관되게 정치ㆍ자본ㆍ언론 권력을 감시ㆍ비판해왔던, 한편으로 우리사회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왔던 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와 같은 프로그램들이 제 역할을 못하거나 폐지된 후, 그 자리를 어떤 프로그램들이 대신하게 될 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시사교양프로그램이라는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프리랜서 작가로서, 우리는 두렵습니다. 차디 찬 현실에 눈을 감아야 할지도 모를 미래가, 두렵습니다. 언론인의 원칙과 양심을 외면해야 하는 날이 올까, 정치권력과 사주의 입맛에 맞춰 자기검열이 일상화된 글을 쓰는 작가가 될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최근 경제 불황 여파를 맞아 제작비 대폭 삭감의 위기를 앞에 두고, 프로그램의 질을 희생하느니 차라리 월급을 깎으라던 한 PD의 말을 기억합니다. 파업 전야에 당분간 월급을 갖다 줄 수 없음을 알리며 가족들에게 미리 미안하다고 말했다는 어느 PD의 이야기도 기억합니다. 오히려 파업기간에 원고료 지급이 중단될 작가들을 걱정하던 그들입니다. ‘공영방송’이라는 가치를 잃지 않기 위해 잠시 현업을 접고 찬 거리로 나선 언론인들을 가리켜 ‘자사 이기주의’라고 왜곡하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시간과 지면을 아껴 차라리 자신들의 야욕을 솔직히 드러내는 편이 국민 앞에 그나마 덜 부끄러운 일일 거라는 얘길 전하고 싶습니다.
비록 파업 현장에 함께 할 수 없는 프리랜서의 신분이지만, 방송의 한 축을 담당하는 주체로서 MBC 시사교양 작가들은 언론노조의 파업을 지지합니다. 더불어 우리의 방송 동료들이 하루빨리 돌아와 정작 그들이 있어야 할 현장으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웃고, 울고, 한숨을 내쉬고, 분노하며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한국 언론의 미래가 걸린 이 싸움에 지지 않기 위해 미약하나마 보태야 할 힘이 필요하다면, 우리 작가들도 그 길에 함께 나서겠습니다.
2009.12.30. MBC 구성작가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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