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촛불집회에서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생각

녹색세상 2008. 7. 8. 17:47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


7월 5일은 132년간의 식민통치를 끝내고 1962년에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한 날입니다. 또 한국에서는 ‘6.10항쟁기념 촛불집회’ 이후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가 열린 날이기도 합니다. 거리 행진을 끝내고 닭장차 앞에 앉아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폭력-비폭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무와 사람의 차이 가운데 하나는 사람은 나무에 비해 폭력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김치를 먹으려면 배추의 허리를 베어야 하고, 밥을 먹으려면 벼의 목을 베어야 하지요. 그래서 사람은 태생 자체가 폭력의 존재입니다. 석가모니도 간디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까요. 어떤 사람이 ‘나는 아무 것도 죽이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내가 만약 누군가를 죽여야만 살 수 있다면 차라를 나를 죽여 다른 존재를 죽이는 일을 그만 두겠다’라고 마음먹었다고 하죠.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생깁니다. 설사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그것 역시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깐 살려고 하면 누군가를 죽여야 하고, 자신을 죽이자고 하면 그 또한 누군가를 죽여야 하니 폭력 없이 살아 있는 사람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폭력에 반대하며 살아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죽은 사람만이 모든 폭력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사회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비폭력이 원칙인 운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운동이란 사람이 하는 것인데, 그 사람 자체가 폭력 없인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비폭력을 강조하는 운동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비폭력 운동에 대한 오해가 있기도 합니다. 간단한 예가 비폭력운동을 ‘폭력’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물론 비폭력 운동에는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식의 운동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비폭력 운동은 모든 폭력을 거부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보고 그것을 실천해 보자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면서 살인과 같은 극한 상황이나 노예제도와 같은 구조적 억압에 저항하는 폭력을 권리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무장투쟁이라고 해서 언제나 폭력만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의 과정만 봐도 반식민주의자들은 프랑스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뿐만 아니라 백인 식민자들이 드나드는 카페를 폭파하는 테러리즘도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무장투쟁의 뿌리에는 사람들과 토론하고, 조직을 만들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동지들 사이에 사랑이 싹트는 과정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무장투쟁은 비폭력(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운동의 의미로써)의 방법을 기반으로 특정한 시기나 상황에 따라 폭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따라서 비폭력운동이 곧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나 폭력을 사용하는 투쟁이 오직 폭력만을 사용한다고 하는 것은 오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두 가지를 놓고 어느 쪽을 선택하기보다 어느 경우에, 어떤 방법으로 폭력과 비폭력을 사용할 것인지를 토론하고 선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닭장차와 시민들의 자유


촛불집회에 나가보면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의 노랫말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입니다. 모든 권력이 시민에게서 나온다니 참 좋은 말입니다. 국가 권력의 주체가 시민이라는 거죠. 그러면 국가가 사용하는 권력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법도 있고, 행정 조직도 있고, 군대나 경찰과 같은 폭력도 있죠.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국가의 폭력도 시민에게서 나온다고 할 수 있으며, 또 폭력은 시민의 권리라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폭력이란 것을 아무나, 아무렇게나 지 맘 내키는 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폭력 사용에 관한 원칙을 법으로 정하고, 때론 그 실행을 국가에게 위임해서 사용하도록 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촛불집회 과정에서도 드러난 것이 국가가 부당한 목적으로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을 향해 폭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닭장차를 이용해 시민들의 이동과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고요.


그러면 국가가 가로막아 놓은 닭장차 앞에서 시민의 자유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그 방법 가운데 하나는 닭장차를 부수는 것입니다. 국가가 부당한 목적으로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려 할 때 그 제한 수단을 파괴하는 거죠. ‘이명박 정부가 사용한 것은 폭력이다. 하지만 우리가 비록 닭장차를 부수기는 했지만 그것은 폭력이 아니라 정당한 저항이다’라고 돌려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컨테이너 차단벽을 무너뜨리든 닭장차를 부수든 그것은 폭력이며, 국가의 부당한 폭력에 맞서는 시민의 정당한 폭력입니다. 정당성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폭력의 크기나 세기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집회에 참여한 노동자와 농민들을 때려죽이고, 미군기지 넓히겠다고 평택에 사는 시민들을 폭력을 사용해 쫓아낸 것이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런 판국에 닭장차 몇 대 부순다고 뭐가 그리 큰일이겠습니까. 저는 닭장차 몇 대 보다는 시민의 자유 1미터가 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국가가 사용하는 폭력은 쉽게 인정하고 수용하지만 시민들이 사용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두려움이나 망설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공화국 시민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못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화국 시민의 권리는 선거에서 투표하고, 정부 정책에 의견을 반영하는 것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민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국가의 부당한 폭력에 맞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 또한 공화국 시민의 권리입니다. 그리고 ‘지금 폭력을 사용하면 조중동이 얼마나 신이 나서 폭력 시위로 매도를 하겠냐’ ‘지금 폭력을 사용하면 정권에게 탄압의 빌미만 줄 뿐이다’와 같은 판단은 폭력이 시민의 권리라는 생각의 바탕 위에서 토론 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공화국 시민의 권리가 조중동의 주둥이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폭력이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사장이 밀린 임금 달라는 노동자의 뺨을 때리거나 가정에서 남편이 시도 때도 없이 아내를 두들겨 패는 것은 시민의 권리로써의 폭력이 아니라 범죄입니다. 그리고 이런 폭력은 다른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제압해야겠지요. 많은 이들의 바람은 우리 사는 세상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폭력이나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서도 이해하고 존중하며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사회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이 하루아침에 오지는 않겠죠? 때론 자유와 평등이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기도 할 거구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닭장차를 넘어뜨리는 것이 폭력이냐 아니냐를 놓고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 시민의 권리인지 아닌지, 만약 폭력이 시민의 권리라면 어떨 때, 누가, 어떤 종류의 폭력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하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세상/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