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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인간을 더욱 외롭게 해

녹색세상 2007. 9. 7. 05:29
 

해가 뜨면 일하러 가고 / 해가 지면 돌아와 쉰다.

우물을 파서 물을 얻고 / 땅을 일궈 곡식을 거둔다

이처럼 우주의 창조에 동참하니 / 왕이라 해도 이보다 나을 수 없다.

-고대 중국-



자연을 닮아갈 때 인간은 자유롭다


  자연스럽다(自然的, natural)는 말은 자연(自然)에서 나온다. 자연 속에 있을 때 인간은 가장 자연스럽다. “쉬고 싶어요” 이 말은 곧 한적한 땅, 식물, 바람이 있는 자연의 어느 품속에서 있고 싶다는 뜻이다. 따뜻한 봄날, 인위적 공원이라 하더라도 그곳에서 잠시의 기쁨을 느끼지 않는가? 인간의 자아(自我)는 결국 자연(우주)의 자아 안에 있어야만 평온해지며, 숨을 쉴 수 있다. 제 아무리 인공적인 공기가 있다 하더라도 자연의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곧 숨을 거두고 만다.


  아프리카 세네갈의 6,000살의 바오밥 나무-벌목되지 않으면 나무의 역사는 이보다 더 오래될 지도 모른다-에 비해 100년 살이도 되지 않는 인간이 ‘인간 중심’의 오만한 잣대로 온갖 에너지 소비를 극대화시켜왔던 ‘진보’의 역사는 물질적, 정신적, 계급적 소외를 극대화시켜 삶의 피폐와 피곤함만을 가중시켜왔다. 우리는 종종 ‘자유롭고 싶다’는 말을 한다. 자유롭고 싶다는 말은 결국 어디엔가 구속이 되어 있다는 말이다. 어디에 구속되어 있는가? ‘돈’이라는 것? ‘돈’이 많은 부자들은 ‘구속’이 없는가? 도무지 ‘행복’ 또는 ‘자유’라는 것이 현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는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닮아갈 때 인간은 자유롭게 된다.


내 손으로 만드는 의식주, 생산자 공동체를 이루자


  돈을 벌기 위해 우리는 노동을 한다. 의식주 그 모든 것을 돈을 주고 사야 한다. 인간 생존의 최소한 필수품은 무엇일까? 냉장고, 세탁기가 가정 필수품이며, 휴대폰이 사회필수품이 되었다. 대형 마트에서 입을 거리, 먹을거리를 산다. 집을 사는 것은 현대 가계의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척척 살 수 있으며, 필수품은 늘어나고 쌓아놓아야 할 장소(집)는 커야만 한다. 커져 가는 것만큼 쓰레기도 넘쳐난다. 쓰레기도 쌓아 놓을 장소를 찾아야 한다. 모든 것이 커져만 가는 것.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은 더욱 고통스럽게 되어가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필수품은 몇 벌의 옷과 계절이 내어주는 먹을거리, 그리고 가족이 잠을 잘 수 있는 몇 평의 집이 있으면 된다. 내 손으로 만드는 옷, 내 손으로 만든 음식, 내 손으로 만든 집에 살았던 오래전의 삶들은 자신이 만들었기에 버릴 것 없이 더욱 소중하게 다룰 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디자이너가 되었고, 목수가 되었으며, 요리사가 되었다. 이른바 우리 모두는 ‘탤런트’(다재다능)였던 셈이다. 소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가 되어 자신이 소비할 때 가장 검박한 생활이 가능하다. 그럴 때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며, 생산하는 노동은 즐거운 놀이가 된다. 이것은 자연에 뿌리를 둔 농(農)으로 출발할 때 가능하다. 

 

  ▲ 따뜻한 봄햇살이 있는 농장마당에서 월 평가회의를 하다.

 

유기농업으로 삶을 재조직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병은 자연에서 해답을 구하도록 해주었다. 병원에 갈 돈을 사회가 부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병원에 갈 횟수를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연과 함께 할 때, 자연의 식재를 그대로 사용할 때 가능하다. 잡초라고 천대받은 것들이 한방약재로 사용되는 것을 생각하면 잡초가 우리의 일상 식재로 쓰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도시에서 유기농업에 동참하는 것은 농사를 짓는 행위보다 ‘유기농업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도시 소비적 생활을 벗어나는 것이며, 자연생태와의 단절을 복원하는 것이다. 자연 생명의 흐름을 회복하는 것만이 인간의 생명을 되찾는 일이며, 질병의 세대가 된 우리 자식들, 후세대를 보호하는 일이다. 산업문명의 현대사회는 상품을 통한 사회적 연쇄반응을 일으키지만 자연과 농은 생명권의 사회적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비우지 않고 나눌 수 없다


  진보의 역사는 그렇게 축적(쌓아두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쌓아두는 것은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두려움은 소유를 발생시키고 욕심을 가지게 한다. 진보의 역사는 물질적 에너지의 극대화만이 아니라 마음의 에너지도 극도로 소모시키고 있지 않은가? 진보의 역사는 인간을 더욱 외롭게 만들고 있다.


욕심이 있는데 어찌 나눌 수 있을까?

사욕이 있는데 어찌 남을 배려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쌓아놓아야 하는데 어찌 집착이 없을까?

모든 것이 두려운데 어찌 쌓아놓지 않을 수 있을까?


두려움은 결국 자신과 타인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물질과 마음, 비우지 않고 나눔을 생각할 수 없다.

비움은 나눔을 생각할 때 시작할 수 있다.

(변현단/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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