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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에 100년 만에 참회한 천주교의 비겁한 역사

녹색세상 2010. 3. 13. 20:39

살인자로 제명한 과거 씻고 명동성당 추모미사


2010년 3월 26일 명동대성당에선 정진석 추기경의 집전으로 안중근(1879~1910)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맞는 기념미사를 봉헌한다. 한국가톨릭의 최고 지도자가 명동대성당에서 교구 차원의 공식적인 안중근 의사 추모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100년 만에 처음이다. 이래 놓고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천주교를 향해 묻고 싶다. 사제와 교회의 권위가 얼마나 높기에 뒤틀린 역사를 잡는데 무려 100년이나 걸린단 말인가?

 

▲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10일 뤼순감옥 면회실에서 아우 정근ㆍ공근과 함께 면회 온 발렘 신부를 바라보며 유언을 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자료 사진)

 

안중근이 19살 때인 1897년 1월 안 의사와 가족, 친척들은 아버지 안태훈의 권유로 36명이 동시에 프랑스인 빌렘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토마스란 세례명을 받은 안중근은 교리 공부를 열심히 총대(성당 사무장)로서 독실하게 교회활동을 했다. 고향을 떠나 해외로 망명해 의병활동을 하던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 일제의 최고실력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중국의 최고 실력자 원세개는 “5억 중화인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했다”고 찬탄했다.


그렇지만 한국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인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프랑스인 뮈텔 주교(1854~1933)는 일본 검사도 허락한 신부의 면회와 성체성사를 거부했고, 안중근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도 부인했다. 뿐만 아니라 황해도 신천에서 성당에서 함께 지내던 안 의사를 찾아가 사형 직전 종부성사를 한 빌렘 신부에 대해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2개월간 미사 집전을 금하는 성무집행 금지 조처를 내렸다. 가톨릭이 제국주의 앞잡이였음을 보여준 대목이다.

 

반면 뮈텔은 그해 11월 4일 서울의 일본헌병본부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식에 3명의 선교사와 함께 참석해 일제 지도자의 서거를 애도했다. 그런데도 안중근의 신앙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일본인 검사 앞에서 가톨릭신자임을 밝혔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가톨릭에서 죄악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고 “평화로운 남의 나라를 침략해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하는데도 수수방관 하는 것은 죄악이 되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장남 분도를 가톨릭 신부로 키워달라고 아내에게 유언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가톨릭은 한 명도 없어

 

1890년부터 1933년 사망 때까지 우리나라 가톨릭의 최고지도자였던 뮈텔 주교는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의 아픔은 안중에 없었다. 그는 안중근의 사형을 집행한 일본인들이 주검을 가족들에게 넘겨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그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논평했다. 그는 일제의 침탈을 수수방관하는데서 나아가 제국주의자의 시각으로 독립운동을 방해하며 일제를 도왔다. ‘일제와 싸우지 마라’며 일제를 거들려다 도산 안창호의 주먹에 코뼈가 부러진 언더우드 사건을 떠 올리게 한다.

 

지난해 공개된 뮈텔주교의 1911년 1월11일의 일기엔 안중근 일족과 가까운 빌렘신부가 ‘안중근의 동생 야고보(안명근)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들이 테라우치 총독 암살을 꾀하고 있다’는 ‘정보 보고’를 편지로 보내자, 일제 아카보 장군에게 ‘눈길을 헤치고’ 가서 알려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의 밀고로 ‘신민회 105인’은 ‘일망타진’된다. 이런 지도자로 인해 개신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계 지도자들이 힘을 합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가톨릭이 한 명도 포함되지 않는 것을 비롯해 가톨릭은 한국독립운동사에 ‘국외자’로 남는다.

 

1970년대 등장한 정의구현사제단을 중심으로 가톨릭 내에선 안중근 복권운동과 함께 안중근 정신을 잇는 운동이 벌어졌다. 제국주의의 일원이던 프랑스인의 시각으로 식민지 백성의 의거를 ‘살인행위’로 단죄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가톨릭 지도부에 대한 성토가 쏟아지자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은 “일제치하 한국교회를 대표하던 어른들이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한 데 대해 우리 모두가 연대 책임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약자를 외면하는 기독교는 역사의 배반자

 

그 이후 안중근은 가톨릭 제도권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고, 한국 가톨릭의 상징으로 부각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에 협조하며 가톨릭의 성장만을 꾀하던 가톨릭 지도부의 맥을 잇는 지금 “가톨릭에도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인물이 있다”며 안중근을 이용하는 데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안중근 평전’과 ‘종교, 근대의 길을 묻다’ 등의 저서를 통해 ‘가톨릭교인 안중근’을 조명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권력의 편에 서서 약자의 편에 서는 신부들을 내치는 현 가톨릭에서 안중근 정신을 찾아볼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인 전종훈 신부를 안식년이란 명령으로 해임시킨 것과,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갈 곳이 없어 명동성당을 찾아가 담당 신부의 바지를 붙잡으면서까지 울며 호소했을 때 내 쫓았던 사건, 서울교구의 가톨릭중앙의료원 산하 성모병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시킨 사건에서 보듯이 ‘약자의 편에 서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는 한국천주교는 ‘안중근 정신’을 들먹일 자격도 없다.


‘깨물지 못한 혀’에서 이 문제를 다룬 김유철 ‘가톨릭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은 “한국 가톨릭은 안중근과 친일 등에 대한 참회가 선행됐다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나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나가는 등 권력에 협조라는 이름으로 불의가 계속 이어져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쿠데타로 권력을 도둑질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광주학살로 집권한 전두환과 협조한 천주교와, 온갖 핑계로 밀착한 한국기독교는 역사의 배반자임에 분명하다. (한겨레 인용)